사랑에 관한 짧은 노래 8회 (최종회)
우리가 인연이라 부르는 것들은 때로 이런 식으로 찾아온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자석의 양극을 이곳저곳에서 떼어와 서로 붙여놓는다. 그들을 붙여놓은 특별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어쩌면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인지도 모른다. 간호사 아가씨는 조각가 선생을 다시 만난 게 꿈같았다. 언제나 그를 잊지 않고 있던 그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자신을 놔두고, 죽은 요리사 연인을 잊지 못해 세상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죄다 뒤지고 다니던 미친 남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사랑했던 섬세하고 따뜻한 감성을 지닌, 게다가 그녀가 처음으로 새로 쓸 수 있는 자신만의 블랭크 노트, 하얀 새 공책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그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몇 달을 간호한 뒤 그녀는 그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그렇게 그들은 또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단둘이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 그들은 생애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간호사 아가씨는 병원을 그만두고, 사는 집을 개조해서 남편과 함께 예쁜 펜션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그가 물으면 그녀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답해주었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손의 기억은 마치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 서서히 되살아났다. 그는 나무를 잘라 집안을 장식하는 소도구들을 만들었다. 그게 얼마나 훌륭했던지 여행을 온 손님들은 사가기도 하고 주문을 하기도 했다. 사람도 만들도, 개도 닭도 호랑이도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예술가라는 생각은 감히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구두를 만들어 신었다. 갖가지 구두를 만드는 일이 그는 너무 행복했다. 그는 아내가 된 간호사 아가씨에게 수많은 멋진 구두를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언젠가 핸드메이드 수제 구두점을 하나 차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내다버린, 그가 신고 있던 낡은 초록색 구두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회계사 그녀는 조각가 선생의 이런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는 한동안 잊혀졌다. 그녀의 사랑하는 손녀 딸 한나는 수리 학습 능력은 뛰어났지만, 언어 학습 능력은 많이 뒤떨어졌다. 말을 더듬는데다가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유난히 커서 놀림을 받기 일쑤인 한나는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아이의 머리가 커지는 걸 보며 에디슨처럼 천재가 될 거라고 믿고 싶던 그녀의 희망은 어느 날 오후 산산이 부서졌다.
갑자기 구토를 하며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를 하는 한나를 데리고 병원에 간 그녀는 손녀딸이 희귀한 선천성 뇌종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 죽지는 않는다 해도 완치될 가능성은 희박했고, 머리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가볍게 살아온 죄,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녀는 하느님에게 매달렸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표를 얻어 보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 그녀도 그 영원히 끝나지 않을 줄의 맨 마지막 라인에 서 있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수술비는 만만치 않았다. 수술을 한다고 해도 평생 돈이 무한정 드는 특수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의사는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펀드매니저인 남편의 일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무리를 해서 사 모은 주식도 폭락해서 그들 부부는 최악의 경제적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짐 정리를 하다가,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창고에 아무렇게나 가득 쌓여 있는 조각가 선생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어느 햇살 좋은 오후, 그녀는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익살맞은 형상의 그녀의 얼굴과 반신상과 나신을, 그리고 사람의 모습을 변형해 갖가지 상징적 형태로 만들어낸 조각들을 아주 오랜만에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그에 관한 추억을 오래도록 풀어놓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 그녀의 고객 중의 하나가 미술품 경매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렇게 조각가 선생의 작품들은 크리스티 경매에 붙여졌다. 정말 뜻밖에도 그 조각들은 만만치 않은 거액에 팔려나갔다. 그 작품을 사들인 게 누군지 물론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뉴욕에 큰 화랑을 오픈한 조각가 선생의 미국인 전처가 그 조각들을 사들인 거였다.
그녀로부터 그의 소식을 묻는 이메일이 날아왔다. 메일에는 그를 찾고 싶다. 연락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그의 행방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뉴욕에 사는 딸의 뜻을 따라, 뉴욕의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한나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많은 치료비가 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모든 게 만사형통이었다. 그녀는 조각가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할 수 없음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맨해튼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첼시 근처의 은행에 들렸다오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갤러리들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조각가 선생과 함께 갤러리를 돌아다니던 일들이 몇백 년은 흐른 듯했다. 갑자기 그녀는 하루아침에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울적해진 기분으로 긴긴 첼시 거리를 걷다가 그녀는 어느 갤러리에 낯익은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우연히도 조각가 선생의 전시가 열리는 중이었다. 울컥 그리운 마음이 치솟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각가 선생이 자신에게 선물했던 조각들이 고스란히 그곳에 있었다. 그 가치를 몰라보고 홀대해서 창고에 처박아두었던 작품들이, 그것도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간격으로 전시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작품들을 팔아서 이렇게 절실하게 쓰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묻어두었던 그에 관한 기억들이 좁은 골목길이 열려 거리로 넓어지듯 하나씩 확대되었다. 그가 피아노 건반처럼 두피를 두드리며 머리를 감겨주는 법, 그가 만들어주던 오징어먹물 스파게티의 맛, 멀리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세상의 그 아무도 신은 걸 보지 못한 그만의 초록색 구두, 말을 해줄 듯 말 듯하다가 조금씩 두서없이 조각조각 흘린 소설 같은 그의 출생에 관한 고독과 슬픔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본 그녀를 향한 절망적인 눈빛을 떠올렸다. 갤러리 입구에 놓여 있는 신문 리뷰에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를 떠난 신비로운 작가라는 타이틀이 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평소에 사랑하는 미국 서부의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거나, 이름 모를 낯선 별로 여행을 떠났을 거라고도 씌어 있었다. 그가 남긴 이 작품들 하나하나가 그가 창조한 은하계의 하나 밖에 없는 빛나는 별들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녀는 문득 그를 찾아 떠나고 싶었다.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다시 만나 어떻게 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잃어버린 형제자매나 이산가족을 찾는 절실한 기분이 되었다. 만일 하느님이 그녀 편이라면 그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기다리는 캘리포니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연기하고. 조각가 선생이 늘 말하던 신비로운 선인장들로 가득한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지역을 샅샅이 찾아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를 찾아나서는 여행이야말로 자신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숙제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 밝은 전구를 매단 것처럼 온 마음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