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노래 7회
쏟아지는 별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엉뚱하게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떠오른 얼굴은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하면서 떠난 간호사 아가씨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헌신적이고 참 착한 여자였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러면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라는 하찮은 질문이 떠올랐다. 사랑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예전에 유행하던 어느 노래 말처럼 모두가 다 사랑이었다. 살아생전 스쳐갔던 모든 사람도, 시간도, 장소도, 날씨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가 다 사랑이었다. 그런 시시한 생각들 사이로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먼저 졸음이 왔다. 애리조나의 밤하늘은 별들로 가득한 바다였다.
하늘에서 낚시를 하다가 그는 죽음으로 가는 깊은 잠에 빠졌다. 죽은 뒤에 그가 맨 처음으로 만난 건 첫 번째 아내와 두 딸들이었다. 첫 번째 아내가 울고 있었다. "당신 그렇게 맘대로 살아보니 좋아? 아이들은 다 커서 당신이 누군지 묻는데, 나도 당신이 누군지 몰라."
그는 우는 전처 앞에 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아- 나는 왜 이 많은 사람들을 울리며 살아왔는가?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애써 떠올렸다. 그의 할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할아버지는 산에서 용감하게 죽었고, 마른 나뭇가지를 씹어 먹더라도 그 아무것도 훔친 적 없으며, 모르는 아낙을 희롱한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선인장 가득한 애리조나의 초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할아버지의 빨치산 피를 닮아서라고 생각했다. 산에서 죽은 할아버지 때문에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기가 무서워서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했다. 낯선 도시의 시장에서 신발 장사를 하며 딸 하나를 키웠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던 딸이 미술 대학에 들어가 사귄 남자는 치과 대학에 다니던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비도 없는 근본도 모르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을 수 없다고 펄펄 뛰는 부모님 뜻을 따라, 남자는 여자와 헤어지고 소위 집안 좋은 집 딸과 결혼했다. 좋은 집안이란 무엇일까? 삼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은 정반대일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인간들은 정말 우습지도 않은 저울의 기준에 질질 끌려다니며 살다가 죽는다. 말하자면 할머니의 딸을 버린 그 치과 대학생이 조각가 선생의 아버지다. 뒤늦게 아이를 가진 걸 알게 된 어머니는 혼자 그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했다.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형편이 어려워진 젊은 어머니는 친구의 소개로 할머니 몰래 요정에 나가 돈을 벌었다. 어머니는 그 시절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다 오는 고급 요정에서 제일 인기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의 고관대작들이 아무리 살림을 차려준다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이가 조금 크면 일을 그만두리라 생각하며 그녀는 남이 무어라든 앞만 보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아프다며 집을 나간 어머니는 오후에 병원에 실려가 한 시간도 안 되어 급사했다. 그의 나이 두 살이었다.
사실 이게 모두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각가 선생의 상상 속 출생의 기억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출생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꿈은 끝도 없었다. 두 번째로 만난 건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처녀 적 얼굴을 한 낯선 할머니 앞에서 그는 울먹이며 "나는 왕이로소이다. 할머니의 가엾은 손자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런 비슷한 시를 읊었다. 처녀 적 고운 얼굴을 한 할머니는 그에게 춤을 추라고 말했다. 할머니인지 어머니인지 구별이 되지를 않았다. 할머니이면서 어머니인 그 고운 얼굴을 한 이는 아직도 그가 살아야 할 세상은 크고 넓으니 쉬지 말고 춤을 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생전에 신발 장사를 하던 할머니는 수많은 신발들을 그에게 꺼내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은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죽기 전에 신던 초록색 구두를 신고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심장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저려오고 있었다.
그를 기적적으로 피해 내리친 벼락 탓에, 그는 수면제 한 통을 다 먹고 죽음의 문을 노크하는 사이, 아니 죽기도 전에 혼이 나갔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 아래, 선인장을 연구하는 식물학 교수 하나가 그 근처의 선인장들을 연구·조사하다가 누워있는 그를 발견해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수간호사로 일하는 옛날의 그 간호사 아가씨와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그곳에서 간호사 아가씨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으리라는 것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는 살아있었다.
단지 말이 나오지 않았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를 피해 내리친 벼락 탓에 혼이 나간 그는 그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간호사 아가씨가 누구인지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다가 신분증도 없는,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낡은 초록색 구두 한 켤레를 달랑 지닌 그를 간호사 아가씨가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