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나이가 든다는 일은 놀랍게도 아침에 일찍 눈을 뜨는 변화로 찾아왔어요. 매일 새벽 세시나 잠들어 아침 늦게 일어나던 그 오랜 세월의 습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습니다. 아침이 좋아지면 행복한 거라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실 전 늘 행복했어요, 많이 불행하다고 느꼈던 날들도 지나고 생각하니 불행하지만은 않았어요. 마술을 공부하면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속임수를 연구했는지도 모르겠네요. 눈을 딱 감고 이 문을 열면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 바람 부는 황량한 겨울 사막에서 구름이 둥실 떠가는 파란 하늘이 펼쳐지는 봄날의 풍경 속으로 순간이동을 하곤 했어요. 지금 제가 앉아있는 마카오 호텔의 방문을 열고 당신이 계신 바그람으로 가고 싶지만, 눈을 꼭 감고 아무리 순간이동을 꿈꾸어도 마음에도 국경이 있는지 바그람엔 갈 수 없네요. 그곳은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겐 비자가 나오지 않는 여행이 금지된 곳이어요. 홍콩에 전시가 있어 왔다가 마카오에 왔네요.
이곳에 온 건 카지노를 좋아해서는 아니어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그 흔한 고스톱도 못 치는걸요. 오래전 라스베이거스 여행에서 마치 우주선을 타고 다른 혹성에 가보았던 것 같은 신기한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어요. 마카오의 너무도 다른 콘셉트의 각기 다른 눈부시고 화려한 호텔들을 돌다보면 정말 화성, 목성, 명왕성 등으로 연결된 낯선 우주에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육지가 아닌 바다를 매립한 땅 위에 지어진 화려하고 눈부신 호텔들은 인공의 왕국들 같아요. 안데르센 동화 속 헨델과 그레텔의 과자집 같기도 해요. ‘들어와라 먹어라 마셔라 돈을 써라’ 그렇게 유혹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요. 그중에서도 현대적인 작품들이 곳곳에 설치된 윈 호텔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더군요. 밤에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다 보면 파리지안 호텔의 에펠탑이 반짝거리는 게 보여요. 마카오에는 파리도 있고 베니스도 있어요. 베네치안 호텔에 가면 인공의 베니스를 그대로 갖다놓았죠. 호텔의 마술, 그렇게 부르고 싶네요. 마카오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가장 부자인 스탠리 호 회장 소유의 리스보아 호텔이 가장 먼저 눈에 띄어요. 새장 모양을 한 형상적 의미는 호텔 카지노에 들어오면 갇혀서 돈을 다 잃을 때까지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라 하네요.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와 순금으로 만든 풍경 조각들이 눈에 띄어요. 밖에서는 밤새 분수쇼가 펼쳐지죠. 아무 생각 없이 분수에서 음악에 따라 높이 뿜어져 나오는 물 쇼를 보면서 저것도 마술이구나 싶었어요. 이 세상에 마술 아닌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이아몬드여 영원하라」는 007 영화의 주제가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어요. 그 어디선가 들은 듯한 낯익은 노래를 듣는데 문득 결혼식 때 받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떠오르더군요. 크기가 꽤 컸던 걸로 기억되어요. 결혼 전에는 그렇게 화려한 선물로 마음을 휘어잡던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한 푼도 벌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살기가 너무 힘들어 그 반지를 팔러 보석상에 간 저는 그 다이아몬드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사람과 사는 동안 저는 그저 모르는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헤어지면서 그 반지를 돌려주었어요. 이혼을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어쩌면 뉴욕 소호의 갤러리에서 당신을 보았던 그 즈음에, 5번가에서 남편과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한 동양 남자의 손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았어요. 그건 제 결혼반지였어요. 마카오에서 그런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카지노에 열중하는 여자들은 넘쳐나죠. ‘다이아몬드여 영원하라’는 007 영화의 주제가는 언제 들어도 멋져요. 그건 마치 ‘인생은 유한하니 죽기 전에 실컷 놀아라.’ 그런 소리로 들리더군요. 저는 각기 다른 향기를 내뿜는 호텔들을 마치 다른 혹성에 도착하는 기분으로 넘나들면서 혹시라도 남편을 마주칠까 걱정했어요. 그는 카지노에 미친 사람이었으니까요. 뉴욕에 살 땐 가까운 도박 도시 아틀란틱 시티에 가서 몇 날 며칠 돌아오지 않은 날도 많았어요. 알고 보니 마카오 태생인 남편의 새 애인은 그곳 카지노에서 호모섹슈얼들 사이에 무척 인기 있는 남자라 하더군요. 마카오의 호텔 마다 가득 쌓인 명품들을 몇 날 며칠 보면서 그 수많은 명품들이 명품도 그 무엇도 아닌 무의미한 사물로 보였어요.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다는 ‘색즉시공공즉시색’이라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떠오르더군요.
만일 남편을 안개 낀 스톡홀름이 아니라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만났다면 그 사람과 결혼했을까? 만일 당신과 뉴욕 소호의 갤러리가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만났다면, 우리들의 상상의 장소 ‘바그다드카페’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베네치아를 그대로 옮겨놓은 베네치안 호텔에서 긴 복도를 따라 걷다가 파리지안호텔로 들어서면서, 그곳이 바그람이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곳의 낮은 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당신이 서있다면, 우리가 서로 알아볼까요? 당신이 못 알아보면 제가 알아보려고요. 당신을요.
마카오에서, 당신의 친구, 박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