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켜놓은 라디오에서 오래된 팝 짐 크로스Jim Croce의 「time in a bottle」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병 속에 시간을 모아둘 수 있다면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건, 그 시간들을 모아 당신과 함께 영원히 쓸 텐데.” 뭐 그런 노랫말들이 아직 덜 깬 내 잠 사이로 흘러들어왔어요. 정말 세상에 저금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시간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후닥닥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편지를 씁니다. 만일 언젠가 우리가 드디어 만나 이런 기분이 든다면,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흘러간 시간들을 실컷 같이 쓰지 못했다는 슬픈 기분이 든다면,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아요. 아니 우리가 만났던 순간이 한 찰나라 해도, 그 찰나가 이어져 오늘에 왔다는 게 기적이지요. 제가 마술을 배웠던 건 시간이 마술이라는 걸 깨닫기 전이었어요.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뚱뚱한 여주인공이 마술을 하는 장면이 너무 좋아서, 내 슬픔을 아니 타인의 슬픔을 마술로 녹여주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눈속임도 속일 수 없는 ‘시간’이 최고의 마술이지요. 그 옛날 당신과 내가 뉴욕의 소호에서 스쳐 갔던 찰나의 기억은 눈 감고 떠올리면 방금 구운 빵처럼 신선한 냄새를 풍기는데, 시간은 흘러 우리 두 사람만 오롯이 나이 들었네요. 누군가 말했어요. 냄새는 이데올로기라고. 하긴 세상에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이 있을까요? 시간처럼 오래된 이데올로기가 있을 라고요. 불교에서의 가장 짧은 시간 개념인 찰나를 현대적 시간으로 환산하면 75분의 1초, 약 0.013초라고 해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거나 느낄 수 있는 시간은 120찰나(1달찰나怛刹那)로 약 1.6초 라 하네요. 찰나를 영어로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moment’ ‘instant’로는 충분하지 않은 섬광보다 짧은, 산스크리트어에서의 순간의 음역인 ‘크샤나’(찰나)는 120찰나를 1달찰나라 하고, 60달찰나를 1납박臘縛(약 96초)이라 하고, 30납박을 1모호율다牟呼栗多(약 48분)라 하고 30 모호율다를 1주야晝夜(24시간)라 합니다.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되어나가는 현상을 찰나생멸刹那生滅,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 합니다. 현재의 1찰나를 현재, 전 찰나를 과거, 후 찰나를 미래, 이 셋을 합해 ‘찰나삼세刹那三世’라 합니다. 이렇게 섬세한 시간 개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우리가 매 순간 찰나의 떨림 속에서 산다면, 삶은 그리 짧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 소리가 아름답다.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은 아주 오래전 나와 같은 공간 속의 몇백 찰나를 함께했다. 내가 그린 그림은 그의 공간 속에 그와 함께 있다. 등등.
가끔 당신의 방에 걸린 내 그림이 보여요. 그 그림은 여러 개로 증식되어 온통 당신의 방 한가운데에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그런 장면도 보여요. 당신이 수술한 사람이 하나 더 죽을 때마다 그림이 하나씩 더 늘어나, 당신의 방은 떠다니는 그림들로 갤러리가 되고 말아요.
아- 당신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멸하는 순간들을 목격했을까요? 꼭 죽지 않더라도 살아생전 착한 치매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본 적 있나요? 그림치료를 하러 가서 젊을 때 아주 고약한 성격을 지녔던 사람이 아주 온순하게 변하는 착한 치매 환자들을 본 적 있어요. 이럴 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라도 사람들이 착하게 변해서 세상에 전쟁이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그다드에서 또 차량을 이용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더군요. 오늘도 이슬람국가 IS는 자신들이 그랬다고 떳떳하게 말하네요. 내 친구, 앨런, 그곳은 오늘도 안전한가요?
문득 언니와 함께 갔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서 있는 한없이 넓은 터에서 언니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네요. 내가 “볼 것도 없네.” 라고 중얼거리니까 언니가 “너는 왜 저 여백의 비어있음을 보지 못하니?” 하던 말을요. 문득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푸름이 끝이 없었어요. 그 하늘의 여백이 바로 영원처럼 느껴졌어요. 카메라를 들고 먼 시야에다 맞추어 끌어당기니 저 멀리 호숫가 벤치 위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었어요. 찍혀진 사진 속에서 보니 울고 있는 남자는 호수에 비쳐 대칭을 이룬 두 사람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중의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라면, 다른 하나가 당신이라 해도 무방했어요. 하나이면서 두 사람인 울고 있는 사람의 슬픔을 불교에서의 자연수로 표현하면 얼마나 될까? 지금 생각하니 내 그림의 바탕에 무심코 적어 넣던 숫자는 나도 모르게 적은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대수無量大數’ 같은 끝없는 자연수들의 목록이었을지도 몰라요. 불경 속의 가장 큰 자연수를 ‘불가설불가설전不可說不可說轉’이라 해요. 하지만 그것도 끝이 아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숫자를 떠올리며 멀리 있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누고 쪼개면 한없이 길어지기도 하는 시간들에 위로받으며, 매 순간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터에 있었던 당신이 저보다 찰나의 느낌을 더 잘 알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알고 보면 온 세상이 다 전쟁터인데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우리들의 파렴치한 평화, 또한 찰나의 평화겠지요. 당신에 대한 내 오래된 사랑이 혹은 우정이 찰나의 사랑이라 해도,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전쟁터에서 찰나를 살아가는 사람의 과장 된 것이라 해도, 살아있어 행복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살아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Always, 박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