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그 낯선 곳에서 제 그림을 본 당신의 이야기는 꿈이 아니었나요? 제 그림이 캘리포니아 사막을 지나가는 66번 도로에 위치한 영화 속 ‘바그다드 카페’가 아니라 시리아 사막을 통과하는 사막 한가운데 그 멀리 실제로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 걸려있다니 믿어지지 않네요. 하긴 우리 모두는 그 결과만을 알 뿐 프로세스는 알지 못하죠. 어떻게 세상의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지를. 어떻게 세상의 모든 악이 영글어 가는가를. 제 그림이 발이 달려 그 먼 곳까지 걸어갔다면, 얼마나 고단했을까? 보고 싶네요. 그 그림을. 그 그림에 붙은 오래된 시간의 우표를. 어릴 적 우표를 모았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우표 모으기는 제 첫사랑이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그렇게 광적으로 무언가에 미쳐본 사람은 알죠. 사랑은 바로 어딘가에 미치는 것이라는 걸. 그림 그리기가 마지막 사랑이길 기원하는 저는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마음이 늙지 않는 소녀, 사실 저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아요. 어제는 소녀처럼 가을날을 헤매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 제 전화에 수만 번 전화를 해도 낯익은 음악 ‘터틀즈Turtles’의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가 들려왔어요. 핸드폰을 가질 셈이면 꺼놓지 통화가 되랴 싶어 제 핸드폰에다 계속 전화를 걸었어요.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해피 투게더’를 들으며 엉뚱하게도 어린 자식을 유괴당한 부모의 마음을 상상했어요. 그보다 절망적인 감정이 또 있을까? 내 자식이 유괴당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그런 느낌, 전화를 할 때 마다 낯익은 음악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미칠 것 같은 불면의 밤을 보냈답니다. 어쩌면 그건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된 비극적인 기분이었어요. 그깟 핸드폰 잃어버린 걸 자식을 잃어버린 마음과 비교하다니, 그렇게 우리들의 감정은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은 과장 되거나 폄하되기 마련이죠.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당신이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의 병원에서 보고 느낀 장면들은 실제보다 훨씬 과소평가된 비극적인 감정들일 거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살아가죠. 행복은 가끔 무료함이라는 불행의 얼굴을 하고, 불행은 가끔 살아있다는 것만도 축복이라는 행복의 얼굴을 하고 우리들의 일상을 찾아와요. 그래서 드물게 세상은 공평하기도 하죠. 다음 날 저는 제 핸드폰에다 문자를 보냈어요.
“주우신 분께 사례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저장 번호가 너무 많아 꼭 찾았으면 합니다.” 불과 몇 분 뒤 마지막으로 한번 걸어본 제 핸드폰을 누군가 받는 거예요. 백화점 안내데스크라 하더군요. 가보니 핸드폰 커버에 꽂혀있던 얼마간의 현금은 없어지고 신용카드와 최신형 제 핸드폰은 무사히 돌아왔어요. 잃어버린 자식을 찾은 기분과 비교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하지만 더 이상의 아무런 바람도 들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런 게 완벽한 행복의 순간일지도. 행복이란 어쩌면 상실의 경험 없이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일지도 몰라요. 이렇게 평온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당신께 들려주면 당신은 또 어떤 신비한 일상의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전쟁터에서도 일상은 있기 마련이죠.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전쟁이 있듯이. 오늘은 배터리가 10년 동안 떨어지지 않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탁상시계가 멈췄어요.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은 백 살 노인처럼, 어쩌면 그 시계가 멈추지 않을 거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는 거겠죠. 그 시계를 산지 딱 십년 만에 멎었네요. 사람으로 치면 백 살은 더 산 건지도. 십 년 간 배터리가 살아있던 시계에게, 백 살 먹은 노인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의 마지막 섹스는 언제였습니까?” 그런 질문은 영화 속에서도 소설 속에서도 들은 적이 없네요. 하지만 중요한 질문이죠. “당신의 생명의 불꽃은 언제 꺼졌습니까?”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니까요. 그렇다고 죽는 건 아니지요.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아니 살아야하죠. 그렇게 시계가 멈추듯 백 살 노인이 자연사하듯 이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온다하여도 그 순간 저는 누군가와 춤을 추고 싶어요. 삶이 유한할 때는 게으름 피우며 그리지 않던 그 사람의 얼굴을 마지막 남은 몇 분 동안 일필휘지로 그려주고 싶어요. 어쩌면 그게 제가 남긴 최고의 걸작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얼굴이 바로 당신의 얼굴이라면,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하는 깊은 가을이어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종종 왜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워하죠. 하지만 어떤 만남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지 않아요. 이르면 이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그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계절이 있을 테지요.
오늘은 이만. 당신의 전쟁터에 평화가 함께 하기를.
(본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