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이라크 카르빌라 인근 결혼식장에 자살 폭탄테러가 일어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모든 사람이 축복해야 마땅할 결혼식마저 저주의 대상이 된 세상, 내 친구 당신은 무사한가요? 어제는 『바그다드카페』 영화를 무삭제 버전으로 상영해주는 극장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다시 보았네요. 그 옛날에 못 보았던, 아니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 중 하나는 뚱뚱한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 모델을 서면서 젖가슴을 조금씩 많이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우리가 사랑할 때, 흔히 무장해제라고 말하는 그런 시점, 그때가 좋은 때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시점, 하지만 사랑에 좋은 때가 따로 있을까요?
진짜 사랑은 묵을수록 맛있는 사랑이지요. 그래서 드디어는 늙고 병들어 그나마 건강한 한쪽이 아픈 한쪽을 위해 같이 세상을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랑, 너무 욕심이 많은 걸까요?
생각해보니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던 언니는 늘 남자 복이 없었어요. 언니가 운동권이었던 첫째 형부와 헤어진 건 그 시절만 해도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카페랄지 에스프레소랄지 언니의 고급스러운 문화적 영혼을 그가 늘 못마땅해했기 때문이었어요. 아예 그들은 너무 안 맞았어요. 운동권이었던 그가 눈에 뭐가 씌었는지 3년을 악착스레 언니를 쫓아다녀 결혼을 했지만 결혼한 그날부터 그들은 불행했어요. 언니는 늘 자기를 너무 좋아한다 싶으면 그 사람이 맘에 별로 들지 않아도 그를 만나곤 했어요. 마치 사랑받는 일에 굶주린 것처럼. 수없는 남자들이 언니를 많이 좋아했고, 그중의 하나가 두 번째 형부가 된 스웨덴에서 온 디자이너였어요. 그 시절 언니는 동양인들 상대로 관광가이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주로 일본사람들이 많았죠. 디자인을 전공한 언니는 처녀 적에 참 예뻤어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데도 고운 자태는 아직도 남아있었어요. 그 시절 언니를 보면 ‘가을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하고 최양숙이 부르는 「가을편지」의 노랫말이 떠올랐어요.
낡은 이세이 미야케 검은 블라우스에 통이 좁은 바지를 입은 언니의 긴 머리는 처녀 적처럼 바람에 흩날렸지만, 햇볕에 군데군데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가 드러나 보였어요. 초가을 스톡홀름 감라스탄 거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사치스러운 고독을 선물해주죠.
초가을, 유난히 언니가 외롭고 고단해 보여 “언니 서울로 돌아가자.” 하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어요. 그곳 남자들은 남녀평등의 이름으로 결혼하면 가사일도 반은 자기가 맡아 하지만, 무거운 것도 잘 들어주지 않으며, 돈도 꼭 같이 벌어야 하고 식당에서도 더치페이를 한다고. 그게 언니로부터 들은 남녀평등이 최고로 지켜지는 북유럽 남자와의 결혼 이야기였죠. 그리고는 중국 남자들 중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도 잘하고 몸과 마음과 돈을 아끼지 않는 천사 같은 남자들이 있다고 말하곤 했어요. 제 남편도 처음엔 그랬어요. 하긴 국적이 무슨 문제겠어요? 다음 날도 우리는 감라스탄 골목에서 만나 대성당과 왕궁에 들어가 멋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들과 섬세한 천정벽화를 바라보았어요. 저는 그날 저녁 언니네 집으로 그 남자를 데려갔어요. 신기하게도 그는 언니와 초면이 아니라며 반가워했어요. 언니가 안내해 준 스톡홀름이 자기 생애 처음 만난 신비로운 스웨덴이었다고. 우리나라 삼청동 거리를 연상시키는 스톡홀름 감라스탄 거리는 해가 질 무렵 가스등이 하나씩 둘씩 켜지면서 스웨덴이 낳은 영화감독 ‘앙리 베리만’의 우울한 영화들을 연상케 했어요. 영화광이었던 제게 그곳은 잊을 수 없는 장소로 남았어요. 풍요로운데 고독하고 우울하면서 분위기 있는 곳, 자살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곳, 그곳이 아니었다면 남편을 한눈에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가 사랑한다고 말한 사랑, 그때는 진심이었으리라 믿어요. 한 보름 뒤 저는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가서 결혼했어요. 얼마 동안은 뜨겁고 감미롭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은 결코 길지 않았죠.
중국인인 남편은 정말 요리 하나는 참 잘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다 고맙네요. 그 전쟁터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전생의 기억처럼 오래전에 그만둔 그림을 다시 시작했으니까요.
뉴욕 맨해튼 소호에 있는 극장 안젤리카에서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처음 보았을 때, 영화 속의 주인공이 딱 저만 같아서 한참을 울었네요. 마술을 배운 것도 그즈음이었어요. 지금도 생각해요. 마술로 이 세상의 전쟁터를 아름다운 평화의 무대로 바꿔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리고 그때는 영화 속의 ‘바그다드 카페’와는 지리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신비한 도시 바그다드가 전쟁의 불길 속에 휩싸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때였죠.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오늘은 이만, 늘 건강하게 살아남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