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최소 14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고 놀란 마음에 소식 전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매일 듣는 소식일지도.
며칠 전엔 바그다드 시내와 주변의 청과물 시장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350명이 숨졌다는 뉴스를 들었어요. 당신이 있는 ‘바그람’은 ‘바그다드’로부터 먼먼 곳인데도, 자살 폭탄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이네요. 문득 누군가의 이런 말이 떠올라요.
‘누가 상처를 낫게 하는 건 시간뿐이라 했는가? 시간은 상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치유한다.’
그러니 살아온 시간만큼 인류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네요. 그래도 옛날엔 전쟁은 전쟁터에만 있었는데, 이제 세상 모든 곳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터가 되었어요. 파리, 니스, 런던, 평화롭게 들리는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 그중에서도 전쟁의 가장 한 가운데 있는 것만 같은 당신이 매 순간 걱정됩니다. 하긴 오래도록 제 마음속도 누구나의 마음속처럼 전쟁터였네요. 남편을 처음 만난 건 엉뚱하게도 스웨덴 스톡홀름이었어요.
그 시절엔 바그다드도 카불도 평화로웠을까요? 오래된 건축물들 사이로 안개 낀 스톡홀름의 거리를 걷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어요. 그 시절, 하나밖에 없는 언니가 서울 올림픽 때 서울에서 만난 스웨덴 디자이너와 결혼을 해서 스톡홀름에서 살고 있었어요. 저는 언니 얼굴을 보러 갈 겸 꿈속에서나 나올법한 낯설고 신기한 이름의 도시 스톡홀름에 놀러 갔다가, 혼자 감라스탄의 좁은 골목길을 헤맸어요. 해가 지기 시작하고 어스름 속에서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는 우리나라의 삼청동 비슷한 감라스탄의 좁은 골목길에 서서 문득 잉글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흑백 영화 「가스등」을 떠올렸어요. 홀린 듯 서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제가 여행을 온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밝은 웃음을 웃으며 자기는 중국인이라며 스톡홀름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어요. 그런 그와 마치 몇 번은 본 사람처럼 짧은 영어로 웃고 떠들며 와인을 곁들여 저녁까지 같이 먹은 건 그곳이 스톡홀름 감라스탄 골목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골목이 마법을 거는 도시, 하긴 그때만 해도 그는 참 좋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세상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인상이 참 좋았던 탓에 한순간에 그 사람을 믿어버렸죠. 아니 그때만 해도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매 순간 우리는 변화하죠.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결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시죠. 그 말이 맞아요. 하긴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일까요?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지금 저는 알지도 못하는 당신께 편지를 쓰네요. 그래서 좋아요. 아무 말이나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랜 세월 내 그림이 너무 좋아서 머리맡에 붙여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알아서 뭐하겠어요? 우리는 이미 서로 너무 잘 아는 사람일지도. 흑백 영화 「가스등」을 기억하세요?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몇 번을 본 그 영화가 왜 문득 그 순간에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그 영화의 배경은 안개 낀 런던에 켜지는 가스등이었는데 말이죠. 남편이 부유한 상속녀인 아내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아내를 정신병으로 몰아가는 영화의 내용은 으스스했지만, 분위기는 너무 아름답게 남아있어요.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는 용어를 아세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와 그를 이상화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피해자가 만들어내는 병리적 심리현상’이 그 용어의 사전적 정의예요. 저는 부유한 상속녀도 아니었고, 돈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가난한 화가 지망생이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어요.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 중엔 이런 보이지 않는 폭력이 어느 정도 스며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온몸에 폭탄을 장전하고 자폭하게 하는 것도 가스등 효과가 아닐지 생각해보네요. 어린 소녀가 온몸에 폭탄을 장전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폭하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보면서, 저것도 사랑이구나, 정말로 끔찍한 사랑이구나 싶었어요. 자살폭탄 같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같은, 그런 사랑은 이제 그만. 엉뚱한 이야기를 했네요.
늘 건강하게 살아남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