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를 기억하다니, 너무 행복해서 오늘 하루 종일 환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어요. 너무 급작스러운 편지를 보내 당신이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어요. 정말 극한 상황에서 감정은 증폭되기 마련이죠. 당신이 내게 참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 작은 그림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 당신이 안다면, 당신의 표현대로 내 이런 과장된 반가움을 이해하리라 믿어요. 그 작은 그림을 난 어딜 가든 가지고 다녔어요.
지금도 내 작은 방에 걸려있네요. 어쩌면 매일 눈뜨면 보고 잠들 때 보는 그 그림 때문에 당신을 잊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물이 환기시키는 기억의 힘이란 너무도 커서 사람이 죽어도 그가 남긴 물건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죠.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사물이 그림이 아닐까 싶네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본 당신의 그림이 환기시키는 그리움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말하면 당신이 웃을까요?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살 폭탄 테러로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실려 들어오던 날들은 이곳이 지옥이려니 하고 보냈어요. 내가 원해서 들어 온 지옥, 이곳이 지옥이라 해도, 아니 이 세상 그 어디라 해도 보람과 낙을 찾으며 살아가자고 결심한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네요. 어쩌면 소호의 작은 갤러리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던 그때쯤이었을까요? 그러니까 당신과 나의 슬픔이 겹쳐지던 시절이었나 보네요. 그즈음 아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내 곁을 떠났어요. 어쩌면 내가 너무 일만 하느라 바빴던 탓일까요? 떠나면서 아내는 말하더군요. 당신과 가치관과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라고. 자기는 이기적이고 평범한 여자라 타고난 휴머니스트와 평생을 같이 하기엔 그릇이 너무 작다나 뭐라나 그러면서요. 그때는 핑계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해해요, 제 아내를,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같은 시절 같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좋아했다는 우연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요. 박경아, 그게 당신의 이름이죠. 백번이라도 불러보고 싶은 그리운 그 이름, 박경아. 지금 계절은 봄이고, 당신의 나라엔, 아니 내 고향 뉴욕 브루클린에도 꽃잎들이 눈처럼 떨어지겠죠. 그 옛날 아내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심하게 앓았죠.
내가 “아 꽃눈이다. 너무 좋다.” 하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봄은 지옥이야.” 했어요. 그녀가 지옥이 뭔지 알기나 할는지요. 이곳에서 고통스런 환자들과 매 순간 대하다보면 지옥이라는 단어는 차라리 로맨틱하게 들려요. 오늘 친하게 지내는 한국 의사가 ‘버스커 버스커’가 부르는 ‘벚꽃 엔딩’이라는 한국 노래를 보내줬어요. 그 노래를 들으며 당신을 생각했네요. 박경아, 하루 종일 부르고 싶은 그 이름, 왠지 내 맘을 알아줄 것만 같은 당신, 박경아.
그 시절 1990년대 초, 우리들의 아픔이 겹쳐지던 날, 우리가 바그다드 카페 속의 연인들처럼 그렇게 만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비스럽고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한국노래 ‘벚꽃 엔딩’에서처럼 당신과 벚꽃 흩날리는 봄밤을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아직도 믿고 싶어요.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빠른 때임을. 바그다드 카페를 보았던 그 고독했던 봄날이 전생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2016년 봄날에 나는 박경아 당신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그 시절 첫눈에 반해 사버린 당신의 그림은 지금도 내 눈앞에서 수호신처럼 나를 지켜주고 있네요. 이곳의 매 순간 죽음을 상기시켜 주던 위험한 시간들에도 당신의 그림을 바라보면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고독하지만 순수한 열정을 지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림, 하나밖에 없는 당신 박경아, 밤하늘의 수없는 별들 중에서 박경아라는 별을 불러낼 수 있는 이 신기한 영혼의 만남의 장소 바그다드 카페,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꿈만 같네요. 당신의 그림을 가방 속에 넣고 서부로 떠난 나는 한동안 이 도시 저 도시를 배회했어요. 라스베가스를 지나가면서 왠지 하이웨이 주변에 진짜 바그다드 카페가 있을 것만 같아 서성였던 기억도 엊그제 같네요.
생각해보니 그 시절 바그다드 카페는 그 어디에도 아닌 내 마음속에 있었어요. 외로운 마음, 사랑을 바라는 마음, 모든 걸 다 주고 싶은 마음, 용서하는 마음, 그 귀한 마음들을 아직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면 그건 내가 갖고 있는 박경아, 당신의 작은 그림 때문인지도.
오늘은 이만 안녕, 평안한 하루를 보내길.
─ 당신을 사랑하는 앨런, 바그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