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젊은 탈북자는 수시로 “몰라요. 그냥 뭐.” 혹은 “더 이상 말 못할 것 같아요.” “내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중간 중간의 긴 침묵 사이사이 그런 문장들을 자주 되풀이했어요.
‘그냥 쉬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제게는 마치 제가 한 말처럼 하루 종일 메아리쳤어요. 제게는 그림 그리기가 쉬는 일이었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그동안의 힘들었던 삶을 남의 일처럼, 혹은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멀리서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쉬어야 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해. 사랑하는 딸아이가 죽었다는 사실도 잠시 다 잊어버려야 해.
아니 그 애가 죽은 건 사실일까? 그날 밤 꿈속에서 딸아이가 “엄마 난 사실은 안 죽었어.”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몰라요, 그냥 뭐 영화 속의 젊은 탈북자처럼 꿈속에서도 저는 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쉬면서 비행기를 타고, 제게 일어난 세상 일 다 잊어버린 듯 쿠바 아바나에 도착한 저는 잠시 거짓말처럼 많이 행복했어요. 체, 당신을 향한 나의 모든 상상이 현실인 듯 느껴졌어요. 우리의 딸아이가, 미안해요. 제가 이렇게 말하더라도 용서하세요. 우리 딸아이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해도 다음 생이 또 있다고 믿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다음 생은 없다는 걸. 다음 생에는 아바나에 태어나고 싶어요.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 얼마를 살다 간들 충분할까요? 좀 일찍 떠난들 좀 늦게 떠난들. 조금은 예전에 태어나 ‘체 게바라’의 연인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도 용감하고 그렇게도 순수하고 그렇게도 어리석은 나의 영웅 ‘체 게바라’, 현세에 영웅이 없는 건 모두 다 너무 똘똘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체 게바라 전기 영화를 보셨나요?
아- 체 게바라, 그는 내 사랑 ‘체’ 호세를 너무도 닮아있었어요. 영화 속에서 본 체 동무의 일기 속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죠. “혁명가의 가장 큰 기질은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이다. 우매한 민중을 모범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하자. 우리의 꿈은 가능한 일이며 가능해야만 하며 가능할 것이다. 동지여. 당연히.” 그렇게 의연한 ‘체’ 동무는 또 이렇게 쓰지요. “오늘처럼 외롭다면 다시는 여행길에 오르지 못하리라.” 그리고 위대한 체 동무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일기 속에 적어놓았죠. 영원일 수도 순간일 수도 있는 사랑, 사랑은 친밀해지는 거룩한 감정, 사랑은 멀어지는 거룩한 감정, 하지만 혁명과 사랑이 뭐가 다르겠어요?
“내가 슬픔을 표현할 권리가 있는가?” 이 대목에서 저는 울지 않을 수가 없네요. 영원한 형벌이 지루한 일상이 되는, 그게 바로 위대함이라면 저는 그냥 작은 행복을 택할래요.
내 사랑, 체 동무. “과거에 걸어온 안개 자욱한 길을 앞으로도 걷는 망연한 꿈을 가진 이에게.” 이 대목에서 저는 딸아이가 생각나 가슴이 찢어지네요. 뉴욕에 살면서 반미를 외치며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던 나의 딸, 거기엔 아무것도 없단다, 그냥 흐릿한 추억만 있을 뿐. 다시 체 게바라의 일기 속엔 이렇게 씌어 있었죠. 어머니의 아가라 부르는 꾸밈없이 부드러운 말을 듣고 싶다고. 내 사랑 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 내가 당신이 사는 쿠바 아바나에 와 있는데. 체, 체라는 이름이 체 게바라의 본명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는 친구라는 의미인 것도 이제야 알았네요. 체, 아바나는 아름다웠어요.
중세도시처럼 가스등이 흐린 불빛으로 빛나는 어둑한 거리가 문득 제가 살던 평양거리를 떠올리게 하네요. 낮에는 관광객을 태우고 시커먼 연기를 뿜고 달리는 오래된 미국 자동차들이 너무 멋져서 저는 아무런 슬픈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관광코스 중의 하나인 헤밍웨이 별장에도 가 보았죠. 그곳에서 그는 영화로 더 유명한 ‘노인과 바다’를 썼다 해요. 헤밍웨이는 심장이 나쁜데다 무릎 관절염이 심해지고, 게다가 전립선암이 겹쳐 삶의 취미들을 다 포기해야 하는 데서 극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해버리고 말죠. 우리처럼 너무 많은 위기 속을 살며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에게는 헤밍웨이의 자살은 사치라고 느껴지네요.
하지만 사치, 그렇게 아름다운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