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고독하다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뿌리 뽑혀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때로 아무런 비꼬는 마음 없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에, 예를 들어 내가 사무실을 오갈 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거라든가 심부름꾼이나 전차의 차장이 외치는 소리 따위에 감격했다. 나는 처음에 그의 이러한 태도를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것이라고, 일종의 귀족적이고 한량 같은 기질이나 유희적인 감상주의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그의 진공의 공간으로부터 그의 이질감과 ‘황야의 이리’적 존재로부터, 우리의 좁은 시민적인 세계를 경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점차 알게 되었다. 그에게 우리들의 세계는 확고하고 안전한 세계, 그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세계, 그에게는 갈 길이 막혀버린 고향이요 평화였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28쪽.
누군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때가 있다. 그가 내가 진정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를 절망시키는 것은 머나먼 타인의 몰이해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나 자신의 무지다. 내가 지닌 모든 지력과 감성을 다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눈앞에서 ‘나 자신’이라 불리는 거대한 지하갱도의 입구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의식의 도움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오직 의식적인 것만이 인간의 전부라면, 인간에게는 ‘불현듯’, ‘문득’,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모르게’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의식을 뛰어넘는 순간들’은 무의식이 밤에 꿈을 꿀 때만이 아니라 낮에 활발히 활동을 할 때에도 부단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오늘 당신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음에 절망해보았는가. 나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해 억울해하고 답답해하는 고통보다도, 내가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싶은 대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때, 나는 더 깊은 고통을 느낀다. 만약 융이라면 우리의 이런 고통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여러분, 오늘도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으셨습니까. 그 때문에 영혼의 고통을 느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 당신의 무의식과 만나 대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융은 이렇게 조언해주었을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의 내면은 철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해 남몰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곧 우리 마음에 어떤 이성의 굴착기로도 파헤칠 수 없는 거대한 내면의 갱도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야의 이리>의 주인공 ‘나’는 하일러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 매혹된다. 이성적으로는 그를 혐오하지만 감성적으로는 그에게 끌린다. 합리적으로 판단해 보면 하일러는 ‘나’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되지만, 알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가 그를 향해 공감의 눈길을 보내게 만든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나라면 이해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길보다는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아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준다면, 그것은 더없는 축복일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볼 수 없는 어둠 때문에 아직 나 자신일 수가 있다. 모든 이에게는 달의 뒷면처럼 영원히 보이지 않는 영혼의 사각지대가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시선으로 그의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사랑이 내 삶을 비추지 않을 때조차도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이 스스로의 그림자, 영혼의 뒷모습을 인식하기 위해 내면의 탐구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일러가 ‘나’에게 남긴 수기는 바로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고 부른 한 남자의 치열한 내면탐구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남양삼나무 옆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그때 이미 그는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불렀는데, 그 말 또한 나에게는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뭐 이런 표현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어느새 이 표현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곧 내 머릿속에서도 이 사내를 황야의 이리로만 부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들 사이에서, 도시 한가운데에서, 군중들 속에서 길을 잃은 한 마리 이리-다른 어떤 이미지도 그를, 그의 내향성과 고독, 야생성, 불안, 향수, 고향 상실을 더 잘 표현해낼 수는 없으리라.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