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209쪽.
융은 말했다. 인간은 빛의 형상을 상상함으로써 계몽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함으로써 계몽된다고. 우리는 늘 탁월하고 훌륭한 것들에 이끌리도록 교육받지만, 추악한 것들, 암흑 속에 있는 것들에도 마음을 돌려야 한다. 인간에게 추악한 본성이 있다는 것, 인간에게 사악한 욕망, 절망적인 요소들도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식할 수 있을 때 영혼의 성장은 시작된다. 계몽은 단지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을 비추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깊고 짙은 계몽은 바로 어둠을 인식함으로써, 어둠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융이 인간의 사악한 욕망과 악몽들을 깊이 연구한 것도 바로 인간을 전일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융은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커서 내 삶의 계획에서 그것을 가벼이 볼 수 없었다. 혹독한 상황들을 많이 겪으면서 우리가 저질렀거나 안고 있는 죄에 대해 후회할 수는 있지만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사도 바울에게 위안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살 속에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그의 존엄성 뒤에 숨겨두지 않았으니까.”
싯다르타는 자신의 영혼을 할퀴고, 무너뜨리고, 통째로 부정해버리는 아들을 통해 심장이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 고통을 통해 더 큰 사랑의 힘을 느낀다. 아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어도, 아들을 이렇게라도 사랑할 수 있는 운명에 감사하게 된 것이다. 아들이 없는 아늑한 평화보다 아들이 있는 끔찍한 고통을 택하는 것이 사랑임을,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그는 항상 자신의 곁에서 모든 아픔을 함께 하고 강물의 소리를 들으며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을 이해했던 바주데바야말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스승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사랑을 절대로 받아주지 않는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더욱 크고, 깊고, 강해진다. 자신의 나약함을 앎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힘겨운 수행을 거듭하면서도 아직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고빈다에게 자신의 일생에 걸친 방황의 의미를 들려준다. 더 이상 이 세상을 증오하는 일을 그만두기 위하여, 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을 찾기 위해,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재단하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에게 ‘죄악’도 ‘절망’도 꼭 필요했다고. 관능적 쾌락은 물론 돈에 대한 욕심, 허영심,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까지도,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했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절망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절망에 지치고, 사악함에 빠지고, 부질없는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평범한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을 속속들이 받아들이고 경험해야만 세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진실을 외면해온 것이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기만 하는 금욕적 수행만으로는 깨달음의 길에 오를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철저히 물욕과 단절한 채 오직 수행 그 자체를 위한 수행에 한평생을 바친 고빈다가 아직 해탈의 길에 이르지 못한 까닭도 바로 자신을 ‘빛이 있는 쪽’으로만 몰아세웠기 때문은 아닐까.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신이 일평생에 걸쳐 부딪히고, 배우고, 절망하고, 슬퍼한 모든 것들을 전해준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결코 수행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싯다르타가 평생을 바쳐 이루어낸 깨달음의 깊이를 감지하게 된다.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최고의 깨달음의 정점에 이미 다녀온 것을 알게 된다. 싯다르타는 그 깨달음을 독점하지 않고 고빈다에게 남김없이 전해준다. 그 극적인 소통의 카타르시스 속에서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느낀다. 나는 고빈다와 함께 살며시 빌어본다. 자기 안의 가장 깊고 아픈 어둠과 만남으로써 또 다른 깨달음의 여정 위에 오른 싯다르타의 발자국마다 지혜의 연꽃이 피어나기를.
고빈다는 허리를 굽혀 큰절을 올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의 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그의 가슴 속에서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 가장 겸허한 존경의 감정이 마치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그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했었던 그 모든 것,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치있고 신성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그는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싯다르타에게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