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말라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싯다르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완성자의 얼굴은 어떤가 보기 위하여, 그 완성자의 평화를 호흡하기 위하여, 고타마한테로 순례의 길을 떠나려 했는데, 고타마 대신에 이제 싯다르타를 보게 되었으며, 이것은 잘 된 것이라고, 고타마를 만난 것 만큼이나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혀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 마지막 고통이 그녀의 눈을 가득 채웠을 때, 마지막 전율이 그녀의 사지 위로 퍼졌을 때,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67쪽.
싯다르타가 깨달음의 강물을 건너가는 동안, 싯다르타의 연인이었던 카말라는 홀로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른다. 싯다르타가 ‘옴의 깨달음’을 경험한 후 몇 년이 흐른 후, 카말라는 고타마의 입적이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열반을 보러 먼 길을 떠나온다. 그러나 고된 여행길에서 뱀에 물린 카말라는 죽음의 위험에 처하고,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구하려 애쓰지만 끝내 그녀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카말라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보진 못했지만 연인이었던 또다른 싯다르타를 만나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싯다르타의 아들을 그에게 맡겨둔 채 세상을 떠난다. 싯다르타에게 아들은 뜻하지 않은 기쁨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 모든 깨달음의 숲을 다 건너왔어도 그 깨달음의 경험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 핏줄의 인연이 나타난 것이다. 깨달음의 여정 위에 있을 때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라후라(방해자)’라고 하며 밀어내버리고 싶어 했던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헤세의 싯다르타는 아들을 보는 순간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싯다르타의 아들은 카말라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왔기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살림살이와 욕심 없는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은 싯다르타에게 걸핏하면 반항하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거침없이 표출한다. 자식 때문에 고통 받는 싯다르타를 보며, 싯다르타와 함께 살며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던 뱃사공 밧스데바는 말한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아들을 보호하려 해도, 아들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의 짐을 대신 져줄 수는 없다고.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지혜로워도,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지녀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싯다르타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들을 통해 깨닫는다. 싯다르타는 슬픔 속에서 깨달아야만 한다. 마음을 다해 사랑해도 지켜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들은 급기야 집을 나가버리고 싯다르타는 절망에 빠진다. 누구도 누군가를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지켜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치유의 길, 깨달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면, 그 누구도 그 결심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밖에는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내 그림자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 그것은 나를 가장 부끄럽고 아프게 하는 바로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인생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융 심리학의 매혹은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라’는 식의 조언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융의 글을 읽고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의 치유자가 바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융심리학에서는 환자가 가장 중요한 주체다. 치유자는 전문가이자 지식인이고, 환자는 다만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식의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융의 글을 읽을 때마다, 치료당하는 쪽도 치료하는 쪽도 나 자신인 그런 정신의 모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굳건해진다. 나는 융이 만들어낸 심리학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의 치유자는 나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그림과 에세이로 담은 <레드북>을 쓰면서 모두가 자기만의 레드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자기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내면의 여정을 관찰하고 기록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이미 치유의 열쇠는 자기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당신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지요? (....) 누가 사문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죄업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주었던가요? 아버지의 경건함, 스승들의 훈계, 자신의 지식, 자신의 구도 행위가 그를 지켜줄 수 있었던가요? 어느 아버지, 어느 스승이 지켜서서 그를 말릴 수가 있었겠어요?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일, 그러한 삶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 스스로 자신의 죄업을 짊어지게 하는 일, 스스로 쓰디쓴 술을 마시는 일,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일, 그런 일을 못하게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