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며, 그 새가 기쁨에 겨워 지저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새가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기가 그 새의 죽음을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그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죽은 것이다. 오래전부터 죽음을 갈망해 마지않았던 그 어떤 다른 것이 죽은 것이다. 죽은 것은 자기가 옛날 언젠가 작열하던 태양 아래에서 참회의 생활을 하던 시절 사멸시켜 버리고자 하였던 바로 그것이 아닐까? 죽은 것은 바로 자신의 자아가 아닐까?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4쪽.
깨달음은 섬광처럼 다가오기에 그 깨달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사후적이다. 무의식이 먼저 깨닫고, 의식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깨달음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깨달음의 희열을 느꼈던 과정을 돌이켜본다. ‘옴의 전체성’을 깨달은 것은 싯다르타의 무의식이었다. 그 깨달음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기며, 그의 의식은 무의식의 깨달음을 의식화한다. 깨달음의 의식화 과정은 미술에서 마블링 기법과 유사하다. 수면 위에 유성 물감을 띄워 휘휘 저은 후 우연, 혹은 필연으로 만들어지는 각양각색의 무늬들. 종이로 그 무늬의 표면을 조심스레 떠내면 마블링이 완성된다. 물과 유성물감이 서로 충돌하면서 섞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종이 위에는 유성 물감과 물이 마치 춤을 추는 듯 어우러진 자취가 남게 된다. 어떤 방향으로 섞일지 예측 불가능한 물과 유성물감의 소용돌이가 무의식이라면, 그 무의식이 요동치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종이가 바로 의식이다.
의식은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무의식의 움직임을 포착해내고, 기억해내고, 의식의 방에 각인시킨다. 싯다르타는 자신도 예측할 수 없었던 그 무의식의 깨달음을 의식화하면서 천천히 과거를 되새김질한다. 그는 자기 내면의 분신, 작은 새가 죽은 줄로 알았지만, 실은 그 새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새의 날갯짓을 방해하던 장애물이 죽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지나친 부담일 수도 있고, 깨달음을 향한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다. 궁극의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을 막다른 목록으로 몰아세우는 동안, 오히려 싯다르타의 자아는 엄청나게 비대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로 깨달음의 주인이라는 의식, 내가 바로 깨달음의 완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신념이야말로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내면의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싯다르타의 무의식이 싯다르타의 의식에게 건네는 말을 듣게 된다.
“자기가 그 숱한 세월동안 투쟁을 벌여왔던 대상, 언제나 거듭하여 자기를 이겼던 것, 매번 사멸하고 나서도 매번 또다시 살아나, 기쁨을 금지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그것, 바로 자신의 그 작고 불안한, 자만에 찬 자아가 죽은 것이 아닐까? 이곳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스런 강가에서 오늘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기가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토록 확신에 넘쳐서, 이토록 두려움 없이, 이토록 기쁨에 차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145쪽)
싯다르타는 의식의 단단한 장벽을 뚫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온 무의식의 속삭임을 듣기 시작한다. 싯다르타는 이제야 깨닫는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아름다운 경구들이, 너무 많은 규칙들이 그의 진정한 깨달음을 방해하였음을. 너무 많은 단식과, 너무 많은 행위와, 너무 많은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망치고 있었음을. 비움과 되새김이 동반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채우고 몰아치기만 했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있었고, 어딜 가나 언제나 항상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자만심이 그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회와 단식으로 이런 교만과 강한 자의식을 죽여 보려 했지만, 단지 욕망을 절제하는 것만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채우려고만 했기 때문에 비울 수도, 들여다볼 수도, 되새겨 볼 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지식과 규칙과 의심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사유를 위한 여백, 또 다른 나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빈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에고의 핵심에는 ‘결국은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라는 뿌리 깊은 자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토록 찾으려했던 자아, 에고를 오히려 죽임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기에 이를 수 있었다.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문에 자기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쾌락과 권력에, 여자와 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런 자가 될 수밖에 었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던 사제의식과 사문의식이 죽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 그런 싯다르타는 죽고 없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싯다르타란 덧없는 존재이며, 형상을 지닌 것은 모조리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기는, 이 새로운 싯다르타는 젊고 기쁨에 가득 찬 어린아이이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