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는 오로지 고행, 사색, 침잠에만 관심을 쏟았으며,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梵)을 추구하였으며, 아트만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숭배하였지. 그러다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속죄하는 참회자들을 따라가 숲속에서 생활하였고, 더위와 추위에 시달렸으며, 굶주리는 법을 배웠으며, 나의 육신을 소멸시키는 법을 배웠지. 그러다가 놀랍게도 그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이 세상의 단일성에 대한 앎이 나 자신의 혈액과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에서 순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지. 그러나 부처로부터도 이 모든 위대한 사람으로부터도 나는 또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카말라를 만나 그녀한테서 사랑의 쾌락을 배웠으며, 카마스와미한테서는 장사하는 기술을 배웠으며, 돈을 모았으며,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으며, 나의 위胃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나의 관능적 감각들에 아첨하는 법을 배웠지.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0쪽.
싯다르타가 만약 고빈다와 헤어지지 않고, 살아있는 부처 고타마를 따라 꾸준히 수행을 계속했더라면 그는 여인의 유혹과 금전적 사치, 호화로운 생활과 도박의 쾌락에 빠져들지 않고 무사히 훌륭한 수행자가 되지 않았을까. 쾌락이나 유혹이라는 자극의 요인이 없는 곳이었다면, 그의 깨달음은 더 빨리, 덜 고통스럽게 찾아오지 않았을까. 너무도 고통스럽게 형극의 길을 걸어 깨달음의 문턱을 넘고 있는 싯다르타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융이라면 이 작품을 어둠의 소중함, 그림자의 가치를 일깨우는 이야기로 보았을 것 같다.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받은 타인을 비로소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융은 어둠이 있어야만 비로소 열리는 밝음의 세계를 긍정했다. 인간은 상처와 그림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전체성에 도달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싯다르타에게 고통은 필연적인 축복이었다. 깨달음이라는 천상의 열락悅樂과 쾌락이라는 지상의 열락은 반대극의 결합처럼 필연적인 한 쌍이었다. 서로 반대되는 ‘대극opposites'의 합일을 통해서만 전체성을 회복하는 무의식의 드라마, 그것이 바로 싯다르타의 여정이었다.
제2의 인격, 즉 내면의 본성이 숨기고 있는 어둠과 그늘이야말로 개성화의 본질이다. 융은 자신의 내면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없는 엄격한 가정과 학교에서 자라나면서 오히려 제2의 인격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땅 속에 깊이 파묻혔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다시 밖으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해보았다.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좌절한 뒤 죽음 같은 어둠의 시간을 견뎌내기도 했다. 물론 융만큼 고통스러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빛과 합일될 수 있는 어둠’이 커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개성화의 시작이었다. 융은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달았다. 융은 빛과 어둠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할 것 같다. 가능한 한 가장 많은 빛을 내면의 어둠으로 가져가기 위해 자신에겐 필연적으로 어둠이 다가왔다고. 그는 안다. 어둠은 빛의 반대말이 아니라 빛을 진정으로 빛이게 만드는 또 다른 힘이라는 것을.
싯다르타는 어리석음의 극한까지 걸어가 본다. 육체적 욕망의 허무를 알면서도 그 끝까지 치달았고, 더 많은 재산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면서도 돈벌이와 도박에 중독되었다. 그리고 싯다르타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 자살까지 시도한다. 그 어리석음의 극단에서 잃어버린 자기와 만난다. 수행자로서의 의무를 잊고 세속적 욕망에 탐닉해 온 시간은 살아있다는 것의 고통과 쾌락의 끝을 탐닉하게 한 소중한 체험이었다. 상처받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상처의 본질, 쾌락의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쾌락의 허무를, 그는 절절하게 느꼈다. 그가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통해 본 것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자기 안의 무의식, 깨달음의 나무였다. 어둠과 상처와 그림자와 고통을 통해서만 기어이 자라는 무의식의 나무, 거기에는 대극의 통합, 즉 가장 어리석은 욕망과 가장 지혜로운 욕망의 만남, 절망의 극한과 희망의 극한, 추악함의 극단과 아름다움의 극단의 만남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 모든 절망을 체험해야만 그는 자비를, 희망을,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었음을. 그는 더 밝은 빛을 낳는 더 짙은 어둠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내가 단지 또다시 어린애가 되고 또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 얼마나 많은 악덕, 얼마나 많은 오류, 얼마나 많은 구토증과 환멸과 비참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난 길이었어.....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