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해 동안 온갖 번뇌와 온갖 각성과 온갖 절망도 해내지 못하였던 일을, 옴이 그의 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온 바로 이 순간이 해냈으니, 그는 비참함과 미망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깨달았던 것이다.
“옴!”
그는 혼잣말로 소리를 내었다.
(…) 그러자 그는 바라문을 알게 되었으며, 생의 불멸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든 신성神性을 다시 알게 되었다. (…) 싯다르타는 옴을 중얼거리다가, 피곤에 지쳐 온몸을 쭉 편 채, 야자나무 밑동에 풀썩 쓰러져 머리를 나무뿌리에 베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31쪽.
싯다르타가 죽음을 결심하고 강물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끝없는 추락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면의 기적이 일어난다. 물에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싯다르타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 무의식의 전체성과 조우한 것이다. 성공한 장사꾼이라는 가면에 가려져 있었던 진짜 자아, 여전히 깨달음의 길을 찾고 있는 변함없는 수행자의 모습을. 그것은 고통스러운 자기 확인이긴 하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자신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의 무의식은 분명 사치와 도박을 일삼는 장사꾼이 되어버린 싯다르타라는 한 세속의 남자를 진정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가여워하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 물은 무의식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어 싯다르타의 전존재를 꿰뚫는 성찰의 프리즘이 되어준다.
물의 거울을 들여다본 사람은, 물론 먼저 자기 자신의 상을 본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자는 자신과의 만남을 무릅쓰게 된다. 거울은 아첨하지 않고 그 안에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즉 연극배우의 가면은 페르조나Persona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던 그 얼굴을 충실하게 내보인다. (…) 이것은 내면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첫 번째 담력시험이다. (…)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아는 데서 오는 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다면 비로소 과제의 작은 부분은 해결된다.
- 칼 구스타프 융, 한국융연구원/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원형과 무의식>, 솔, 2006, 127쪽.
‘물’은 무의식을 은유하는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다. 물 속 깊은 곳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행위는 곧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투시하는 것과 같다. 싯다르타는 죽음을 결심하고, 즉 죽음까지 불사하고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했다. 그러자 영원히 잠든 줄로만 알았던 무의식의 풍경風磬이 울리기 시작한다. 무의식의 가능성을 의식의 표면 밖으로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안의 깊은 어둠으로, 내면의 무성한 그림자의 동굴 속으로 깊이 침잠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상승을 위한 하강이다. 싯다르타는 끝 간 데 없는 나락을 예상하며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자 했다. 그런데 그 절망적인 자기 탐사의 여행은 뜻밖의 구원의 메시지를 타전해준다. 싯다르타는 깊이 하강했다. 더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더 깊이 존재의 심연으로 자맥질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는 이 놀라운 경험을 ‘옴의 사유’라고 이름 붙여 본다. 하나의 전체성을 상징하는 ‘옴’이라는 단어는 곧 싯다르타가 그토록 찾아 헤매왔던 ‘자아’의 전체성이자 무의식의 전체성이기도 했다. ‘무어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지만 완성된 그 무엇인 옴’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몰입하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길임을 싯다르타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명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싯다르타는 옴을 웅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나지막이 그는 혼잣말로 옴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어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긴 잠 전체가 바로 명상에 잠긴 채 하나의 긴 옴을 발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자신의 긴 잠 전체가 바로 하나의 옴의 사유,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완성된 그 무엇인 옴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몰입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아무튼 그 잠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의 단잠이었던가! 여태껏 잠이 자기를 그렇게 상쾌하게 해주고, 그렇게 새롭게 해주고, 그렇게 도로 젊어지게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