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고빈다, 나는 ‘인간은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하여 오랜 시간 노력하였지만 아직도 그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 친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아트만이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35쪽.
<싯다르타>에는 두 명의 싯다르타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제 인물 부처 고타마 붓다. 한 사람은 깨달음의 길을 찾아 끝없이 방랑하는 이야기의 주인공, 싯다르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깨달음을 완성한 실존 인물 싯다르타가 아니라 헤르만 헤세가 창조한 인물, 싯다르타다. 헤르만 헤세는 왜 동명이인의 혼동을 감수하고, 두 명의 싯다르타를 등장시켰을까. 헤세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한 위대한 인물의 전기(biography)처럼 안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완전한 개성화에 이르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문제적 인물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 속의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탄탄대로를 걷지 않는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배움의 가치를 의심한다. 배움에 모든 것을 걸고 출가까지 했으면서, 배움의 가치를 의심하는 그는 실제 부처가 설법을 펼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반신반의한다. 아마 나라도 싯다르타처럼 의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부처라지만, 그가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진리를 설파할 수 있을까. 부처를 만난다고 해서 부처의 깨달음까지 만날 수 있을까. 이렇듯 헤르만 헤세는 ‘실존하는 위대한 인물 싯다르타’가 아니라 독자가 얼마든지 감정이입할 수 있는 ‘고뇌하는 인간 싯다르타’를 통해 깨달음의 어려움을 더욱 실감 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닐까.
융은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네 가지로 신앙, 희망, 사랑 그리고 인식을 들었다. 그런데 의사로서 그가 느끼는 어려움은 바로 이 네 가지 축복을 환자에게 선물할 만한 어떤 하나의 체계나 진리를 생각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력투구하여도 얻기 힘든 이 네 가지 가장 고귀한 성과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줄 수도 받을 수도, 그냥 얻을 수도 벌어들일 수도 없는 은총이라는 것이다. 융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약이나 첨단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에 진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체험’이라 믿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어떻게 약이나 치료가 아닌 ‘체험’이라는 처방을 내릴 수 있을까. 의사가 어떻게 체험 자체를 선물할 수 있을까. 융이 인류의 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각종 신화와 예술작품에 뜨거운 관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이 체험의 보물창고로서의 각종 ‘이야기’가 지닌 심리학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싯다르타가 자신을 가르치고 있던 스승에게 실망하여 떠나고 싶어할 때쯤 ‘진짜 부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다. 싯다르타는 부처의 설법을 들으러 직접 가보자는 친구 고빈다의 청을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에게서 배운다’는 관념 자체에 깊은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싯다르타를 가르치고 있던 스승도 모두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현자였지만 싯다르타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남의 몸으로 체험하여 깨달은 지식을 가만히 앉아서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배움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체험 또한 언어로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떠나는 싯다르타를 보며 광분하는 스승을 버리고, 싯다르타는 부처를 만나러 떠난다. 부처는 과연 무언가를 깨달은 자에게서만 우러나오는 영혼의 빛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부처의 깨달음을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부처의 깨달음을 언어를 통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배움의 허상을 의심한 것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스승을 통해, 심지어 인터넷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의 습득 과정을 과연 ‘배운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온몸을 투과하여 내 온정신을 뒤흔들지 않는 지식, 그런 지식을 과연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처는 겸허한 태도로 생각에 잠긴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고요한 얼굴은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아 보였으며, 내면을 향하여 그윽한 미소를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어 눈에 띄지 않는 그런 미소를 머금고, 사뿐사뿐, 유유히, 튼튼한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부처는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는 다른 모든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법복을 걸치고, 엄격한 계율에 따라서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과 그의 발걸음, 그의 조용히 내리깐 눈길, 그의 얌전하게 아래로 내려뜨린 그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모두 평화를 말하고 있었고, 완성을 말하고 있었으며, 무언가를 구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모방하지도 않았으며, 결코 시들지 않는 안식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빛 속에서, 결코 깨뜨릴 수 없는 평화 속에서 부드럽게 숨쉬고 있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