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정좌를 하고서 호흡을 줄이는 법을 배웠으며, 호흡을 거의 하지 않고서도 버티어나가는 법을 배웠으며, 호흡을 아예 멈추어버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맨 처음 호흡을 진정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심장의 박동을 진정시키는 법을 배웠으며, 심장의 박동수를 줄여나가는 법을 배웠는데, 마침내 심장의 박동 수가 점차 줄어들어 심장의 박동이 거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사문들 가운데 최연장자의 가르침을 받아, 새로운 사문의 규칙들에 따라서, 자기 초탈 수련을 하였으며 침잠 수련을 하였다. (…) 그는 자기의 감각을 죽였고, 자기의 기억을 죽였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15쪽.
싯다르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 때문에 즐거움을 느꼈으나, 정작 싯다르타는 자신을 즐겁게 하는 법을 몰랐다. 그는 인간사의 쾌락에서는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앎의 즐거움, 깨달음의 희열만이 그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먹고 자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인간사의 보편적인 욕망 속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보았다. 세속의 쾌락은 오히려 그의 절망을 가중시켰다. 인간은 왜 순간의 쾌락을 위하여 진정한 깨달음의 기회를 놓치는가. 욕망, 기억, 감각.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인간은 평생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싯다르타는 최고의 스승을 만나 자기초탈의 수련을 통하여 바로 그 모든 욕망의 기원, 자아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는 자신의 감각을 죽이고, 기억을 죽이고, 마침내 육체의 욕망마저 죽이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싯다르타는 스승이 가르쳐주는 자기초탈의 수련법을 마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갈증을 느낀다. 오히려 출가하기 전보다 더 심각한 배움의 목마름을 느낀다. 그는 자아를 초탈하여 다른 존재가 되어보기도 하고, 자아를 넘어선 비아非我의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모든 사유의 모험을 끝내고 나면 ‘자아’로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무리 기를 쓰고 수련을 해도 ‘자아’로 되돌아오는 윤회의 업보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왜 나일 수밖에 없는가. 왜 아무리 나를 떠나도 또 다시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로 되돌아오는가. 심리학자 융이라면, 싯다르타의 이런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믿음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융은 <무의식의 분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기의 기분이나 정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계획이나 결정 속에 몰래 들어올 때의 여러 가지 은밀한 방법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주인은 아닌 것이다.” 싯다르타는 제어할 수 없는 자아, 꿰뚫어볼 수 없는 자아, 즉 무의식과의 완전한 만남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싯다르타는 의문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나는 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술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온갖 종류의 자아를 잃어버리는 법은 사실 수련생활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연마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것들은 창녀들이 모여 사는 거리의 술집에서나, 마부들과 주사위 도박꾼들한테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술을 마시거나 약에 취해도 자기초탈은 가능해지지 않는가? 왜 이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자기초탈의 수련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과연 깨달음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오랜 벗 고빈다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친구여. 우리가 과연 올바른 길을 걷고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도대체 해탈의 경지에 접근하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였던 우리가, 혹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영영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천 번이나 그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떠났으며,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비아의 경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러한 길들은 비록 자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통하기는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그런 길들이었다. 싯다르타는 수천 번씩이나 자아로부터 도망쳐 나와서, 무無의 세계 속에 잠시 머물러보기도 하고, 짐승 속에 또는 돌 속에 잠시 머물러보기도 하였지만, 자아로 되돌아오는 길은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었으며,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으니,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햇빛 속에서도, 달빛 속에서도, 그늘 속에서도, 또는 빗속에서도 또 다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고 또 다시 자아가, 싯다르타가 되어 있었으며 또 다른 고통스런 윤회의 업보를 느꼈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30~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