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문트, 나는 자네한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네. 예술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네. 예전에는 예술이 사상이나 학문에 비해 진지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신과 물질의 미심쩍은 혼합물이고 정신은 인간에게 영원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지만, 물질은 인간을 끌어내려 덧없는 것에 속박시키므로 자신의 삶을 숭고하고 의미있게 만들려면 감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413~414쪽.
이제는 어엿한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의 도움을 받아, 골드문트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한다. 그가 겪어온 초인적인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가 저지른 죄를 대속할 수는 없다. 골드문트는 그 극복 불가능한 죄를 인정한다. 그는 고해를 통한 속죄가 아니라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꾼다. 그는 혼신의 열정으로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 나르치스는 생을 불사르는 열정으로 만들어진 골드문트의 작품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본다. 나르치스는 자신이 평생 걸어온 길, 가장 옳다고 믿었던 세계를 의심하고 성찰함으로써 더 나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나르치스의 세계는 순수한 로고스 중심의 세계였다. 나르치스가 고수했던 철저한 로고스 중심의 세계는 삶을 단정한 규칙과 엄격한 제도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었던 나르치스에게 치명적으로 결여된 것은 에로스, 즉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 비합리적이지만 삶을 지탱해주는 뭉클한 감정이었다.
로고스가 대상을 절단하고 배제하고 분리하는 힘이라면 에로스는 끊어진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힘이다. 도저히 한 하늘을 이고 살 것 같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조차도 끝내 이어주는 힘, 그것이 에로스의 권능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통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던 에로스의 힘을 깨닫게 된다. 골드문트를 오랫동안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골드문트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이해함으로써, 그는 삶에서 에로스가 지닌 거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 융은 남성 심리는 보편적으로 로고스의 원리에 따르고, 여성 심리는 보편적으로 에로스의 원리에 따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융이 추구했던 이상적 인간상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고루 갖춘 상태, 즉 로고스와 에로스를 동시에 강하게 지닌 양성적 매력을 지닌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로고스가 질서와 체계를 추구한다면, 에로스는 관계와 연대를 추구한다. 로고스가 세계를 통제하고 유지하는 힘이라면 에로스는 세계를 창조하고 초월하는 힘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통해 예술의 아름다움을, 에로스의 소중함을 배운다. 골드문트는 한때 자신이 동경했지만 끝내 지킬 수 없었던 단정한 로고스의 소중함을, 나르치스를 통해 눈물겹게 배운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고, 비로소 자기 안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남아 계속 작품활동을 하길 바라지만, 방랑벽을 견디지 못하고 또 다시 길을 떠나는 골드문트를 가로막지 못한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골드문트의 ‘그다움’이야말로 나르치스가 가장 사랑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또 다시 터무니없는 사랑과 그칠 줄 모르는 방황을 찾아 떠나지만, 이제 병들고 노쇠해버린 그에게는 더 이상 방랑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병든 몸으로 수도원으로 돌아와 최후를 맞게 된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세상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가슴 아픈 고백을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단 한 사람은, 너였다고.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건 바로 너 때문이라고. 이 사랑은 너무 깊고 크고 아픈 것이어서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아니었다면 사랑의 슬픔과 그리움의 아픔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아니었다면 자기 안에 빛나고 있는 에로스의 열정을, 창조를 향한 동경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골드문트는 마침내 삶 저편의 완전한 어둠이자 완전한 빛의 기원, 인류의 어머니 이브의 품 안으로 돌아간다. 홀로 세상에 남은 나르치스는 뼈아픈 고독 속에서 골드문트가 선물하고 간 천상의 예술을, 태초의 이브를, 에로스의 빛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모범적인 삶의 질서와 규율,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단념, 더러운 일과 피 묻히는 일을 멀리 하고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 (…) 세상에 등을 돌리고 손을 씻은 채 정결한 삶을 살면서 조화가 넘치는 아름다운 사상의 정원을 꾸며놓고 잘 가꾸어진 화단 사이로 죄를 모르고 거니는 것보다는 어쩌면 세상의 끔찍스런 흐름과 혼돈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러다가 죄를 짓기도 하고 죄의 쓰라린 결과를 감수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더 당당하고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 해진 신발을 신고 숲과 시골길을 누비며 눈비를 맞고 굶주림과 곤핍한 처지를 겪고 감각의 쾌락을 즐기다가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살아가는 편이 어쩌면 더 힘들고 용감하며 고귀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떻든 골드문트는 원래 고귀한 일을 하도록 점지된 사람이 인생의 피냄새 나고 걷잡을 수 없는 아수라장에 너무나 깊숙이 빠져들어 수많은 오물과 피로 자기 몸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왜소하거나 천박하지 않았고, 자기 속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움을 죽이지도 않았다. 어두운 욕망에 깊숙이 말려들어 방황하면서도 그의 영혼의 성스러운 곳에서는 성스러운 빛과 창조력이 결코 소진되지 않았던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3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