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예술가이고 나는 사색가야. 너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을 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잠을 자는 거야. 내게는 태양이 보이지만 네게는 달과 별들이 보이는 거야. 네 꿈에는 처녀들이 나오지만 내 꿈에는 소년들이 나오는 것이고.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
융은 현대인의 커다란 불행의 원인으로서 ‘감성과 지성의 불일치’를 든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행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라면, 감성과 지성과 행동의 일치가 가능한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인격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감성과 지성, 그 어쩔 수 없는 불일치를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나르치스의 탁월함은 자신의 결핍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깨달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를 ‘총명하다’라고, ‘천재적이다’라고 칭찬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핍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지성의 과잉, 감성의 결핍. 무언가를 알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는 능하지만, 사랑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즐기고, 예술을 창조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나르치스 스스로가 분석한 자신의 치명적인 결핍이었다. 그는 골드문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골드문트야말로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최고의 벗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감성이 충만한 골드문트가 엉뚱하게 지성의 추구를 향해 매진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왜 그토록 섬세하고 풍부한 감각을 지닌 사랑스러운 인간이, 꽃향기와 아침의 태양, 언어와 새들의 비상이나 음악을 즐기고 사랑해야 마땅할 젊은이가 왜 성직자가 되어 고행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고집하는 것인가.”
골드문트는 오랜 방랑과 고행 끝에 비로소 자신의 결핍을 깨닫는다. 그는 ‘어머니’로 상징되는 모든 여성적인 힘들과 억지로 결별해왔으며, 여성들로부터 사랑과 감성과 배려를 배움으로써 그동안 ‘아버지의 세계’만으로 통제하려 했던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깨닫는다. 또한 그는 나르치스를 통해 자신이 ‘감성의 과잉’과 ‘이성의 결핍’을 화해시켜야 함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함께 했던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훨씬 많지만, 이미 서로에게 정신적 반려가 된 두 사람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느낀다. 골드문트는 고행과 수련을 통해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자신에게 결핍된 사상과 논리를 나르치스의 존재를 통해 인식한다. 그토록 복잡했던 여성편력은 골드문트에게 이제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토록 고생스러웠던 방랑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투영하는 데 더없이 풍부한 자료의 보물창고가 된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화해만으로 골드문트가 위대한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골드문트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장애물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살인의 기억이었다. 융은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인간의 악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자기 인식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반드시 악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악에 대한 상상’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그건 내가 하지 않았어’라며 모든 악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악행에 대해 ‘그 또한 나의 숨겨진 본성 중의 하나’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기인식이 시작된다. 골드문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살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죄의 망각’이 아니라 ‘죄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였다.
너의 본질은 모성적이야. 너희들은 충만함 속에서 살고 있어서 사랑하고 체험하는 힘을 타고 났기 때문이지. 하지만 우리 같은 정신적인 사람들은 때때로 너희들을 이끌어가고 지배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런 충만함 속에서는 살지 못하는 거야. 우린 메마른 생활 속에서 살고 있어. 충만한 삶, 즙이 흐르는 과일, 사랑의 화원, 아름다운 예술의 나라는 너희들의 것이야.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상태에서 질식하는 거야.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