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말하자면 태양과 달이며 바다와 육지야. 우리들의 목표는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를 통찰하고 서로 존경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 상반되는 것이 무엇이며 서로 보완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이지.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
절망의 심연을 통과한 골드문트는 드디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부름’을 깨닫게 된다. 극한의 공포와 생존 자체의 위기를 겪는 동안, 골드문트는 자신에게는 사랑과 방랑을 뛰어넘는 운명적 과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예술’을 향한 끝없는 열정이었다. 그는 이제 자연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직접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예술가이자 장인인 니클라우스와의 만남은 골드문트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수도원에서 신학을 배운 것은 의무감에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니클라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골드문트 스스로의 자발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는 니클라우스의 작품에 매혹되었고, 니클라우스가 지닌 모든 예술적 기교를 착실히 배움으로써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스위스 융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던 융 학파의 대가 제임스 힐먼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부모의 유전자를 반반씩 물려받지만 정신은 엄마와 아빠의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라고 한다. 즉 아이의 정신은 ‘엄마의 유전자’와 ‘아빠의 유전자’를 반반씩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만의 고유한 ‘자기 운명의 유전자’를 타고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옛 사람들은 다이몬이라고도 했고, 운명의 부름이라고도 했다. 아이에게 ‘넌 왜 아빠를 닮지 않았니?’ ‘엄마를 닮았으면 공부를 잘했을 텐데’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덫인 셈이다. 모든 아이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운명의 도토리’가 잠재되어 있으며 부모의 역할은 ‘더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만이 가진 운명의 도토리’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사랑도, 아버지의 인정도 받지 못했던 골드문트는 환경만으로 본다면 고아나 마찬가지였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 그는 나르치스라는 최고의 스승이자 지음知音의 벗을 만나고, 니클라우스라는 훌륭한 멘토를 만나 자기 운명의 도토리를 스스로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장을 꿈꾼다. 그러나 그 성장이 외적 성장에 치우쳐있기 때문에, 아무리 성공을 해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영혼의 갈증은 오히려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다. 융은 그런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 지식’이라고 했고, 제임스 힐먼은 ‘하향 성장’이라고 했다.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기 지식’이라면, 외적인 성장만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하향 성장’이다. 자기의 무의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끝없이 하향 성장을 추구할 때, 진정한 개성화도 가능해진다. 자기 지식은 ‘나에게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숨은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하향 성장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눈에 확 띄는 쪽으로 자라려는 외적인 성장의 욕망을 절제하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자기 지식이 실현되는 극적인 사례 중 하나는 바로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체험한 것 같은 기적적인 개종 같은 것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전혀 반대되는 사상이나 예술작품에 강렬한 자극을 받고, 인생의 진로 자체를 바꾸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숨겨진 무의식’과 만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재능이나 열망이 주변 환경 때문에 억압될 수도 있고,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운명의 부름을 깨닫기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끝없이 미루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 지식의 실현이 지연되기도 한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자기 지식을 일깨워준 스승이었고, 니클라우스는 골드문트의 하향 성장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멘토였던 것이다.
이 지상에 현존하는 모든 것은 그러한 이원적인 것과 대립된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여자가 아니면 남자이고, 떠돌이가 아니면 안주자며, 이성적이 아니면 감정적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도 내뱉고, 남자이면서도 여자가 되고, 자유를 원하면서도 질서를 바라고, 충동적이면서도 정신적이 되는 그런 양면을 동시에 체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를 위해서는 다른 것을 잃는다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한 가지는 다른 것만큼 중요하고도 열망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