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얼굴의 하일너는 교장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반항하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많은 아이들은 속으로 용감한 하일너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훈계가 끝나고 모두 떠들썩하게 복도로 나갔을 때 하일너는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문둥병 환자처럼 혼자 남았다. 지금 그의 편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한스 기벤라트도 편을 들지 않았다. 그는 하일너의 편을 드는 것이 자신의 의무일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 자신의 비겁함에 괴로워했다. (…) 친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국가가 학생을 후원하며 베푸는 친절에는 항상 정확하고 엄격한 규율이 따르는 법이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00쪽.
융 심리학자로 잘 알려진 로버트 존슨은 자신의 무의식을 돌보고, 관찰하고, 마침내 의식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내면작업’이라고 불렀다. 그는 의식의 광채에 가려 무의식의 그림자를 돌볼 겨를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자신의 내면작업을 위대한 오디세이로 만들라”고. 실제로 멀리 떠나는 것만이 위대한 오디세이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남들에게 보여주는 삶에 가려 정작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삶’의 오디세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절실한 마음여행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문학 속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오디세이를 통해 인류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무의식의 그림자를 찬찬히 훑어볼 수 있다. 사춘기 소년 한스는 아직 ‘무의식의 오디세이’를 적극적으로 시작하지 못한 단계라고도 볼 수 있다.
어린 한스에게는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를 의식의 햇빛에 비추어 볼 줄 아는 지혜가 부족했다. 두려움과 오만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스의 의식을 지배하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면의 성장을 방해한다. ‘난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오만이 한스의 성장을 방해하고, ‘하일너와 친해지고 싶지만, 그러면 공부에 방해가 될텐데’라는 두려움이 한스의 우정을 방해한다. 한스는 하일너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면서 지금까지 간신히 단속해왔던 자신의 내면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경험한다. 융 심리학에서 이 분열의 고통은 이후의 내면통합을 향한 장대한 여정에서 필수적인 통과의례다. 언젠가는 이 힘겨운 시기가 지나고 더 멋진 자아와 만날 수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한스는 그토록 처참한 자아의 분열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한스의 주변에는 그것을 깨우쳐줄 만한 진정한 스승이 없었다.
한스를 둘러싼 어른들은 ‘도구적 사랑’으로 한스를 시험하고 있다. 특히 목사나 교장의 태도는 도구적 사랑의 참혹한 결과를 증언한다. 그들은 한스가 신학자로 성공해서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위신을 세워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한스의 여위어가는 몸과 시들어가는 영혼을 걱정해 주기는커녕 더 강인하게 스파르타식으로 한스를 훈육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로버트 존슨은 무의식에서 ‘상징’을 읽어내는 법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타오르는 불꽃이 자연히 열을 방출하듯이 무의식은 본래부터 상징을 만들어낸다고. 우리가 꿈의 언어를 배운다면 개꿈이나 무시해도 좋을 꿈은 없어진다고. 스스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성과 감식안을 길러야 자신의 꿈이 창조하는 내면의 드라마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의식의 핸들을 다잡지 못하면 무의식의 바다에 침몰할 수도 있다. 로버트 존슨은 의식이 무의식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명상’을 처방한다. 직접 무의식으로 들어가 거기 뭐가 있는지, 누가 있는지 찾아내서, 그 존재가 의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내면작업의 핵심, 적극적인 명상이다. 이것이 혼자서는 어렵기에 구루가 필요한 것이다. 한스의 주위에는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는 많았지만 내면의 성장을 도와주는 진정한 구루가 존재하지 않았다.
드디어 뻣뻣하게 굳은 작은 소년의 시체를 눈 쌓인 갈대숲의 들것에 뉘었을 때는 벌써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 그들의 짓눌린 영혼은 갑자기 전율을 느꼈고 맹수를 만난 노루처럼 잔인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 한스는 뜻밖에 창백한 친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자 왠지 모르지만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불쑥 마음이 움직여 하일너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하일너는 불쾌한 얼굴로 손을 빼더니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바로 다른 자리를 찾아 대열의 맨 뒷줄로 사라졌다.
(…) 모범생 한스의 가슴은 슬픔과 수치심으로 쿵쿵 뛰었다. 얼어붙은 들판을 비틀거리며 걷는데 추워서 새파래진 뺨 위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