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콜리니코프는 순간 자신의 거짓말을 절감했다. 그는 앞으로도 아무와도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또 그런 기회마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 생각이 몹시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한순간 억제할 힘을 잃어버린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 “그런데 로쟈, 왜 이렇게 지독한 방을 얻었니? 마치 관 같지 않니? (…) 아마 네 우울증의 원인도 반 이상이 이런 음침한 방 때문일 게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302~305쪽.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심을 고백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워진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감옥에 가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이 아닐까. 라스콜리니코프를 옆에서 오랫동안 관찰해 온 라주미힌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문제를 정확히 간파한다. “로쟈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아니, 절대로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두냐는 흥분하여 라주미힌에게 따진다. “그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로쟈의 경우, 사랑하는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려, 이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결코 현실 속에서 마음을 다하여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라스콜리니코프가 진정으로 벗어나야 했던 자신의 ‘죄’가 아니었을까.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인생과 세상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두냐에게까지 심한 말을 내뱉고 만다. 너는 돈 때문에 루진과 결혼하는 것이 분명하니, 나를 위해서 그런 희생을 할 필요는 없으며, 루진과 결혼한다면 자신과는 인연을 끊어달라고. “나는 아무리 비열한 놈이 돼도 괜찮지만 너까지 그럴 수는 없어. 알겠니? 너는 나와 루진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러니까 네가 루진에게 간다면 나는 그때부터 너를 누이동생으로 인정하지 않겠어.” 두냐는 오빠의 협박을 받자 충격에 휩싸인다. 두냐로서는 오랫동안 고민하여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자기도 갖지 못하는 용기를 내게 요구하는 거예요. 그건 횡포예요! 폭력이예요! 제가 누굴 망친다는 거예요! 저 하나밖에 더 망치겠어요? 저는 살인을 저지르려는 건 아녜요! 아니, 어째서 그런 눈으로 보시죠? 어째서 그처럼 창백해졌어요? 오빠, 왜 그러시죠? 오빠?” (307) 로쟈는 금방이라도 기절해버릴 것 같지만, 이 와중에도 누이의 선택을 말리려 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영원한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리게 될 것임을.
한편, 장발장 또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아무에게도 ‘나의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아무에게도 ‘내가 장발장이다’라고 말하지 않은 채 철저히 신분을 숨기며 버텨왔는데. 코제트를 위해서, 코제트에게 선물해줄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기며 살아왔는데. 장발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겨도 코제뜨만은 ‘내 딸’이라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라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도피생활을 견뎌왔다. 장발장은 수십 년 동안 추적해온 자베르 경관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져 오는 것을 느끼며, 평생 도망다녀왔던 자신의 삶에 이제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생길 것을 예감한다. 그는 그 변화로부터 한사코 도망치고 싶었다. 세계를 코제뜨와 머물고 있는 작은 수도원으로 압축시키고, 오직 그 세계 안에서만 완전히 만족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코제뜨를 수녀로 만들고, 자신은 이 수도원에서 늙어 죽고 싶다는 이 소망. 이것은 어쩌면 코제뜨의 인생을 도둑처럼 ‘훔쳐서’ 얻은 평화가 아닐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오직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빼앗아야 성취되는 것일까. 그는 드디어 결심한다. 수녀원에서 나와 세상 밖으로 나아가기로. 코제뜨에게 ‘강요된 평화’가 아닌 ‘진짜 인생’을 선물해주기 위해.
사실 코제뜨는 인생을 버리기 전에 먼저 인생이 뭐라는 것을 알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처음부터 본인의 의견도 듣지 않고 갖은 고통에서 구한다는 단 한 가지 핑계로 모든 기쁨을 이 애에게서 뺏는 것, 이 애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을 기화로 순수성만을 키운다는 것은 오히려 한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고 신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그런 모든 것을 알고 수녀가 된 것을 후회하는 날, 코제뜨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이 마지막 생각은 이기적인 것으로 다른 무엇보다 사내답지 못한 생각이었으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나오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그러기로 결심했다. 나가는 데 무슨 장애는 없었다. 5년이나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는 다 사라진 터였다. 안심하고 나가도 되었다. 그는 늙고 세상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누가 그를 알아보겠는가?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18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