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에서 벗어나 있다는 자위 본능의 승리감과 마음을 압박하는 위험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 뿐 거기엔 예측도 분석도, 미래에의 상상도, 통찰도, 의문도,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지극히 본능적이고도 순수한 동물적 환희의 순간이었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132쪽.
이제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망칠 것이다. 그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라는 덫으로부터만 도망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열심히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동안 그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경찰이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살인 혐의’가 아니라 방세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환되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그래, 그들이 노파의 살인 혐의자로 설마 나를 지목하지는 않겠지. 난 그저 방세를 못 낼 정도로 가난한 고학생일 뿐이야. 나에겐 죄가 없다고. 그는 자기 운명에 대한 증오를 회피하기 위해 타인을 향한 증오를 이용한다. 자기 운명에 대한 증오를 타인에 대한 증오와 맞바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당한’ 증오라면 살인이라도 불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죄인’이라는 구속으로부터만 도망치면 자기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과연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을 살해한 스스로의 과거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살인을 계획하고, 살인을 실행하고, 살인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한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한편 장발장은 더 이상 장발장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신부님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마음의 빛을 밑천 삼아, 열심히 일하고, 누구에게나 베풀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장발장’으로부터만은 벗어나야 했다. 그가 ‘죄인 장발장’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신분을 위조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일단 이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다. 장발장이라는 낙인 자체가 너무 지독하고 잔인한 것이어서, 도저히 그 이름을 가지고는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양심의 가책만 제외하면, 그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성공을 일구어낸다. 그는 오직 지역 사람들의 믿음과 존경을 바탕으로, 일약 ‘시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가로서 군림하려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어렵고,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을 도우려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돌보려했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바로 창녀 팡틴느와 그의 딸 꼬제뜨였다.
구원은 저 높은 곳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보다 더 낮은 사람, 자기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 자기보다 더 비참한 운명과 싸우는 사람들에게서 장발장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즉 비참한 사람들이 지닌, 보석보다 귀한 가치다. 구원의 근거를 고상하고 고귀하고 대단한 무엇에서 찾지 않는 것. 자기보다 더 아픈 사람의 삶에 공감하고 연대하고 동참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구하게 되는 이야기. 이것이 <레 미제라블>이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전세계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이 세상에서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사람들. 다만 자신의 몸밖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법률의 보호망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국가가 보호해 주지 않는 사람들. 인류의 모든 짐을 떠맡은 정도의 노동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 빅토르 위고의 시선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레 미제라블. 바로 이런 아프고, 또 아픈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눈물을 멈추지 않는 것. 거기에 빅토르 위고의 구원이, 문학의 위엄이 존재하고 있다.
꼬제뜨는 5살도 채 되기 전에 그 집안의 하녀가 되었다. 5살에 그럴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말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의 고통은 아무리 어린 나이에도 시작된다. 최근에도, 고아로 자라나 도둑이 된 뒤몰라르라는 인간의 재판이 잇지 않았던가. 재판기록에 의하면, 이 사나이는 5살 때부터 세상에 외톨이로 내던져져 ‘살기 위해 일하고 도둑질을 했다’ 꼬제뜨는 심부름하고, 방과 안마당과 바깥을 청소하고, 접시를 씻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까지 했다. 떼나르디에와 그 아내는, 몽트뢰이유 쉬르 메르에 있는 꼬제뜨의 어머니가 돈을 제대로 부쳐오지 않게 되면서 마구 부리는 것을 더욱 당연하게 생각했다.
몇 달동안 돈이 밀려 있었다.
3년이 지난 이때 꼬제뜨의 어머니가 만일 몽페르메이유에 왔다고 할지라도 자기 아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그토록 귀엽고 생생했던 꼬제뜨는, 지금은 말라빠지고 파리해져 있었다. (…) 불공평한 세상은 그녀의 성질을 비뚤어지게 하고, 불행은 그녀를 추하게 만들었다. 옛 모습이라고는 아름다운 눈만 남아 있었으나, 그 눈은 차라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했다. 커다란 눈이었기에 한결 많은 슬픔이 서려 있는 듯 보였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