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보게. 여기에 무지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되는 병든 노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자신도 왜 살아가는지 모르고 있는 다 늙어빠진 노파가 있다, 알겠나? (…) 그런데 말일세, 또 한편에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시들어버리고 마는 젊고 신선한 힘이 있네. 이건 어디를 가나 있지. 그런데 수도원에 기부하기로 한 노파의 돈만 가지면 부활하고 재생할 수 있는 백 가지, 천 가지의 훌륭한 계획과 사업이 있네! (…) 수십 개의 가정이 그로 인해 궁핍과 파멸과 타락과 성병으로부터 구원받을지도 모르지! (…) 그 노파를 죽여서 돈을 빼앗는다면-이건 물론 그 돈을 전 인류의 복지와 공공사업에 바친다는 조건 아래 하는 말일세-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 개의 사소한 범죄가 수천의 생명에 보답이 될 수 없을까? 단지 하나의 생명을 희생하여 수천, 수만의 생명이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건 간단한 산수가 아닌가?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91~92쪽.
절망에 빠진 라스콜리니코프가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바로 전당포를 운영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악덕 고리대금의 끔찍한 사슬에 휘말리게 하고,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보이지 않는 파렴치한 노파 알료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얼마 전부터 세상을 향한 증오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아있는 악당, 알료나에게 투사하기 시작했다. 남에게 해만 끼치는 저런 인간만 없다면, 이 세상은 조금 살 만해지지 않을까. 저 여자의 넘치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 세상을 향한 증오, 가난하고 힘없고 희망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이 모든 감정이 한데 뭉뚱그려져 알료나라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무서운 속도로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음식점에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남자들을 만난다. 두 남자는 알료나의 피도 눈물도 없는 성정을 알고 있으며, 그들 주변에는 그녀에게 돈을 꾸었다가 낭패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돈을 갚는 기한이 하루만 지나도 물건을 가차없이 처분해버리는가 하면, 한 달에 5부 내지는 7부나 되는 엄청난 이자를 거리낌없이 받아내고,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물건값을 책정하여 돈 빌리는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는다는 것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남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침 자신의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던 그 끔찍한 망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자 당황스러우면서도 이것이 일종의 ‘계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노파를 죽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녀의 돈을 나눠준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녀의 전재산을 인류의 복지와 공공사업에 바친다 하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옳은 일일까. “한 개의 사소한 범죄가 수천의 생명에 보답이 될 수 없을까? 단지 하나의 생명을 희생하여 수천, 수만의 생명이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건 간단한 산수가 아닌가?” 낯선 남자들은 이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간단한 산수’로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증오와 분노, 원한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빠져 있는 이 지독한 망상 속에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 노파의 목숨을 가십거리 삼아 잡담을 하는 이 남자들과 라스콜리니코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냥 ‘잡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일을 ‘실행’에 옮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따진다면, 장발장을 따라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발장은 충분히 분노했고 충분히 절망했다. 더 이상 분노하고 절망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장발장을 구원한 것은 그의 증오와 분노가 아니라 그의 가슴 속에 실낱같이 살아남아 있었던 사랑의 불씨였다. 신부님은 장발장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선의를 보여준 것이다. 장발장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어떻게 하면 장발장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하고, 어떤 꿈을 꾸어도 좌절되는, 장발장의 저주. 어떻게 하면 장발장으로부터,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은 ‘형벌’이 아니라 ‘자비’였다. 그 자비의 본질은 당신이 무슨 끔찍한 일을 저질렀든, 당신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믿음이다.
장발장은 암흑 속에 있었다. 암흑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증오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참혹한 현실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무자비함과 인간을 우매하게 만드는 것으로 가득한 이러한 형벌의 특징은, 그 어떤 저급한 변모를 통하여 인간을 차츰 야수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때로는 인간을 맹수로도 바꾼다. 장발장이 끈덕지게 꾀한 탈옥 계획은, 인간 영혼에 법률이 어떤 기이한 작용을 미치는가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리라. (…) 다시금 붙잡혀 그가 받은 새로운 형벌은 더욱 그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할 뿐이었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42~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