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냐는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일까! 그 애는 그 자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시집을 가려는 것이 아닌가? 그 애는 검은 빵과 물만 먹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안락을 위해 자기 영혼을 팔 여자가 아닌데! (…) 그렇게 평생 동안 200루블이란 돈 때문에 가정교사로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을 테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 내 누이동생은 자기의 안락을 위해서 존경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그자와 영원히 인연을 맺어서 자기의 영혼과 도덕적 감정을 영구히 더럽히기보다는 차라리 노예가 되어 농장으로 가든가 아니면 발틱해 연안의 독일사람에게 종으로 팔려갈 여자라는 것을! 설사 루진의 몸 전체가 순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내의 합법적인 첩 노릇을 할 리는 없다! (…) 오빠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두냐는 모든 것을 팔아버리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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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는 희망 없는 가난에 지쳐 있고, 미래 없는 노력에 지쳐 있다. 가정교사 노릇도 너무나 박봉이고 지긋지긋하여 그만둔 상태다. 학비가 없어서 학교도 그만두고, 세상 모든 일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린 라스콜리니코프. 그에게 더 이상의 타락을 막도록 강제해주는 가장 큰 버팀목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편지를 보내 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준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와 여동생 두냐는 ‘착한 사람’의 모든 자격을 가지고 있다. 심각한 오해를 받았을 때조차도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경쟁을 통해 타인을 압도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소박하게 사용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어머니와 두냐에게 유일한 희망은 라스콜리니코프의 행복이다. 어머니는 두냐의 사윗감으로 루진이라는 변호사를 선택함으로써, 아들 로쟈의 학비와 취직까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편지에 담아 보낸다. 사실 그것은 두냐의 선택이 아니었다. 루진은 두냐를 일방적으로 선택했고, 그는 내심 ‘가난하게 자란 불쌍한 처녀가 변호사 남편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나의 소중한 로쟈’라고 부르며 기나긴 편지를 써주는 어머니의 자상함은 여전히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이 편지에는 희망이라고는 오직 아들밖에 없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러나 정작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부담스럽다. 그는 어머니와 두냐의 희생으로 버텨온 지금까지의 삶이 부끄럽다. 한없이 착한 여자들의 조건 없는 사랑이, 그를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없는 자신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그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가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팔듯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도 오빠를 성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두냐의 희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들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어머니의 선택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착한 사람들의 희생’을 짓밟고 성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장발장은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이 집에 얹혀살며 수많은 조카를 먹여 살려야 했지만, 빵을 훔치기 전까지는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배고픔 때문에 빵을 훔친 그날, 그의 인생은 회생불능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감옥에 있는 동안 누이와 조카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그는 탈옥을 시도하다가 형량이 더욱 늘어, 19년 동안 친구나 연인은 물론 가족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감옥만 나가면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상상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만다. 모든 여관과 모든 음식점은 그를 ‘범죄자’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고, 그는 감옥으로 찾아가 하룻밤만 재워줄 수 없느냐고 구걸하기까지 한다. 이 세상 모든 문이 내 앞에서만 철통같이 닫혀있는 느낌. 그 참혹한 절망감 때문에 장발장은 삶의 끈을 더는 붙들고 있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부님은 장발장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선의를 보여준 것이다. 장발장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장발장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하고, 어떤 꿈을 꾸어도 좌절되는, 장발장의 저주. 어떻게 하면 장발장으로부터,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그에게 접촉한 것은 오직 해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들과의 접촉은 모두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품에 있을 때부터, 누이에게 길러질 때부터 단 한 번도 다정한 말과 친절한 눈길을 받아보지 못했다. 괴로움에서 괴로움으로 넘어오며 그는 차츰 하나의 확신에 이르러, 인생은 투쟁이며 그 투쟁에서 자기는 패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디되었다. 그는 증오심 외에 아무 무기도 갖지 못했다. 그 무기를 그는 감옥에서 날카롭게 갈아 두었다가 나갈 때 갖고 나가리라 결심했다.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