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아주머니가 말이예요. 당신을 경찰에 고발하겠다던걸요.”하고 나스타샤는 말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경찰에? 뭣 때문에?”
“방세도 안 내고 다른 데로 옮기지도 않으니까 그러는 거지 뭐예요.”
“빌어먹을!”하고 그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 “당신은 왜 그렇죠? 매일같이 빈둥빈둥 놀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잖아요? 전에는 가정교사를 하러 다니더니 요즘은 어떻게 된 거지요?”
“하고 있어.”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무얼 하고 있는데요?”
(…) “생각하는 일이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나스타샤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아주 잘 웃었는데 한번 웃기 시작하면 온몸을 흔들어가며 숨이 막힐 때까지 웃어대는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43쪽.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인간의 범죄 성향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영화관에서는 범죄 스릴러가 넘쳐나고, 미국드라마에서 끊임없이 ‘CSI’식 범죄의 서사가 창궐하면서, 사이코패스는 마치 ‘인류의 한 종류’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으로 범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특징 하나로서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죄책감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죄책감이 없을까.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 자체가 마비되었다고 해서 죄책감 자체가 없을까.
나에게는 사이코패스 담론 자체가 허구처럼 들린다. 마치 유행어처럼 번져 나가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불편했던 이유는, 마치 고질병이나 유전적 질환처럼 전혀 고칠 수 없는 심리질환으로 범죄가 환원되어버리는 위험 때문이다. 죄에 대한 처벌의 문제보다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죄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문제다. 아이들에게 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사형제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편에서는 정당방위이지만, 한편에서는 명백한 범죄인 양면적인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리는 하루에 수십 건의 범죄 소식을 듣고 살아가지만, 아직도 범죄의 메커니즘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것은 아닐까.
『죄와 벌』과 『레 미제라블』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여전히 잘 모르고 있는’ 죄의 발생과정과 속죄의 과정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죄와 벌』에 나타난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의 기원은 무엇일까. 내 눈에 비친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의 기원, 그것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자존심 빼면 시체인 성격’의 결합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가난과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의 결합. 그것은 라스콜리니코프를 점점 나락에 빠뜨린다. 거기에다 성공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더해져 라스콜리니코프는 더욱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가난이었지만, 그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함정도 바로 가난이었다. 그가 총명할수록, 그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수록, 가난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굴욕의 감정을 낳았던 것이다.
장발장을 무너뜨린 것은 ‘찢어지는 가난’과 ‘불굴의 성격’ 사이의 결합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나 집에 얹혀살아온 장발장은 늘 배를 곯는 조카들을 위해 안 해 본 막일이 없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짓눌려 있었다. 어느 날 배고픔을 참지 못해 빵을 훔쳤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금세 뉘우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속죄의 기회가 없었다. 법률과 제도를 다루는 냉혹한 사람들은 장발장에게 속죄의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그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참다못해 여러 번 탈옥을 감행하지만, 그때마다 형량이 늘어 결국 처음에는 5년이던 형량이 무려 19년으로 늘어나 버렸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걸핏하면 자신의 노력을 원점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회를 향해 강한 적개심을 느낀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부님의 융숭한 대접과 가없는 은총을 겪고 나서도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신부님에게까지 강한 적개심을 느낀다. 이 사람이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신부님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 수가 있을까. 그의 인자한 얼굴 뒤에 숨은 음흉한 속셈은 무엇일까. 장발장은 의심한다. 그를 인간이하로 대접하는 세상 때문에, 장발장의 타고난 성격인 ‘불굴의 의지’는 ‘가공할 적개심’으로 변모해버렸던 것이다.
정말입니까? 아니, 나를 재워 주는 겁니까? 쫓아내지 않는군요? 죄수인 나를 ‘당신’이라고 불러주는군요! 너라고 하지 않고! ‘어서 나가, 이 새끼!’라고만 늘 들어왔는데. 댁에서도 분명 쫓아내리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신분을 밝혔지요. 아! 여기를 가르쳐 주신 부인은 정말 고마운 분입니다! 밥을 먹다니! 침대도 이불도 시트도 있다니! 세상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19년동안 침대에서 자본 일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쫓아내지 않는군요!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