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죄악이 아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그리고 술 취하는 것이 선행이 아니라는 것도 진리입니다. 내가 그런 것쯤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면 말입니다. 맨주먹밖에 없게 되면……그건 죄악입니다. 사람이란 그저 가난하다는 정도에선 그래도 타고난 고결한 품성을 잃지 않는 법이지만, 알거지가 되고 보면 그런 고상한 감정 따위를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맨주먹이 되고 보면, 이건 인간사회에서 몽둥이로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빗자루로 쓸어낸 쓰레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건 정말 뼈에 사무치는 모욕이지만 알거지가 되고 보면 그것도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첫째 자기 자신부터 스스로를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것입니다! (…) 우리 집 딸애가 처음으로 황색 감찰(창녀의 표시)을 가지고 거리로 나갔을 때, 나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실은 딸애의 그 황색 감찰로 지금 살아가는 형편입니다만…….
-도스토옙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20~23쪽.
단 한 번의 실수가 인생 전체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면? 인간은 그 절망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증오가 그의 온몸을 사로잡는다고 해도,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기회가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바로 이러한 질문을 향한 기나긴 대답처럼 느껴진다.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범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이 있을까. 형벌을 가한다고 해서 죄가 사해질까. 형벌이 과연 인간의 죄책감을, 분노를, 증오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이 작품이 변함없이 고전 리스트에 오르는 이유는 바로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심화하는 ‘죄와 벌’이라는 화두를 단지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문제로 성찰하는 날카로운 시선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고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페테르부르크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만난 알코올 중독자 마스멜라도프. 그는 가난에 관해서는 도가 터버린 사람이다. 그의 딸 소냐가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내의 양말까지 술로 바꾸어 ‘마셔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런데 그의 입속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자의 가슴을 찌른다. 아무리 가난해도 고결한 품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나 ‘그저 가난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면, 가진 것이 맨주먹밖에 없게 되면, 인간은 우선 스스로 자신을 모욕하게 된다고. 알거지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어떤 고상한 감정도 품을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존엄마저 잃게 된다고. 마스멜라도프는 실직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술독에 빠져버림으로써 다시는 가난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그는 아내와 딸이 자신 때문에 받는 고통을 곱씹으면서 괴로워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좀처럼 바꿀 수가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낯선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공포와 연민을 함께 느낀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을 절망에 빠뜨린 ‘가난’과 이 사나이를 알코올 중독에 빠뜨린 ‘가난’이 결국 같은 것임을. 우리가 저지를 죄의 고통스러운 기원임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도 바로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죄를 지문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 죄를 짓고 싶어서가 아니라, 환경 자체가 죄를 유발하는 상황들. 장발장은 그 가련한 사람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빵 한 덩어리를 훔쳐서 처음에는 5년형을 받았고 탈출을 두 번이나 시도하여 무려 19년 형을 받은 장발장. 그는 끝내 탈출하지 못한 채 형기를 다 채우고,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감옥을 드디어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꿈꾸던 그 간절한 자유를 비로소 찾게 되었을 때조차, 그는 자신이 전혀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전과자’를 인간으로 대접해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도 없고, 심지어 남들과 똑같이 돈을 내도 여관에서 잘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장발장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다. 나에게는 영원히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없는 것일까. 내 인생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일까.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벌이 아닌가. 죄보다 더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끔찍한 형벌이 아닌가.
장발장 : 이 미친놈! 넌 글렀어! 넌 어쩔 수 없어! 저 외침소리! 가슴속 울리는 소리! 나락에 떨어지라는 소리! 새 삶이 시작되려는 이 순간. 20년 전에 난 이미 인생의 싸움에서 난 졌다. 이름 대신 번호가 붙여지고 장발장은 없어지고 만 거야. 빵 한 덩어리 훔친 대가로 19년 감옥살이를 했지. 그러나 신부님의 사랑의 기도는 나의 영혼을 울렸네. 신부님은 내게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해주었고, 날 형제라고 불러 주었네. 내가 신의 사랑을 받는다니, 말이 되나. 난 세상을 증오했고 세상은 날 증오했네. 눈에는 눈이다. 세상은 빵이다. 그렇게 살아왔어. 아는 것은 그것뿐. 저분 말씀 한마디면 나는 다시 끌려가서 또다시 감옥살이 신세. 허나 내 가슴 비수에 찔렸네. 내게도 영혼이 있다고? 그럴 수가. 또 다른 세상 아닌가. 무릎 꿇고 쳐다봐. 상처투성이 인생. 막장 같은 내 인생. 무릎 꿇고 쳐다봐. 죄악만이 들끓어. 도망치고 싶어라. 장발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라. 장발장! 24601!
-뮤지컬 <레미제라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