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vs 『이방인』 6회
길들다
그가 우유를 먹지 않고 그대로 남겨놓은 것을 그녀가 알아차릴까? 그것이 결코 배가 고프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도? 그의 입맛에 더 잘 맞는 다른 음식을 가져다 줄까? 만약 그녀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고 싶었다. (…) 그의 입맛을 시험해보기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가져온 여동생은 그것들을 낡은 신문지 위에 펼쳐놓았다. 반쯤 썩은 오래된 야채에, 저녁식사 때 먹다 남은 뼈다귀도 있었는데 거기엔 굳어버린 흰 소스가 엉겨붙어 있었다. (…) 사려 깊은 여동생은 자기 앞에서는 그레고르가 먹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급히 방에서 나가주었다. (…) 그는 너무도 만족스러워 두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치즈와 야채와 소스를 허겁지겁 차례로 먹어치웠다. 신선한 음식들은 오히려 맛이 없었다. 그 냄새조차 참을 수가 없어 그는 먹고 싶은 것들만 한쪽으로 끌어다놓기까지 했다.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51~52쪽.
고통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때, 그 정점이 지나고 나면 이제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조차 사라질 때. 그때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레고르에게 진짜 고통은 벌레로 변해버린 현실이 아니었다. 그레고르가 느낀 고통의 정점은 ‘가족들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가족만을 위해 살았건만, 가족들은 그가 벌레가 되었을 때 그를 연민의 시선으로조차 바라봐주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이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였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적대감’에 가까웠다. 마치 아들이 몹쓸 범죄라도 저지른 듯, 아들이 몹쓸 전염병에라도 걸린 듯, 아버지는 아들을 적대시한다. 어머니와 누이의 반응은 나약함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반응에 가깝지만,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반응은 아들을 절망에 빠뜨린다. 그레고르가 바라는 것은 커다란 것이 아니다. 자기가 무엇을 먹는지, 어디가 아픈지, 조금만 더 관심을 두기를.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던져주기를.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사소한 친밀감’이다.
그레고르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사랑스러운 동물로 변했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보송보송한 털이 있고, 따스한 온도가 있고, 살과 살이 부대낄 때 느껴지는 독특한 친밀감을 뿜어내는 포유류였다면.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쓰다듬어주었을까. 이름 모를 거대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끔찍한 외모는 일단 가족들에게 혐오감과 공포감을 심어준다. 그것은 가족들의 기대, 가족들의 지갑, 가족들의 버팀목으로 살아온 실질적인 가장 그레고르의 파괴된 영혼을 가장 닮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는 꿈에서라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이지만 숨 막히는 의무감과 보이지 않는 착취, 은밀한 계약으로 맺어져 있는 이 무정한 관계 속에서 그레고르는 가장 끔찍한 희생양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벌레로 변해버린다면 이 악무한의 사슬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무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주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가 벌레가 되어버린 것은 어느 순간 독자에게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벌레가 된 상황을 짐작보다 훨씬 빨리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길들기 시작한 것이다. 길들기 쉽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레고르의 취약점이고, 주어진 임무에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취약점이 아닐까.
어떤 감정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연기하는 뫼르소. 그도 또한 ‘벌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길든다. 그는 ‘모든 것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냉혹한 대전제 속에 자신의 복잡다단한 삶 전체를 밀어 넣으려 하지만, 사실 그는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영혼을 가졌다. 그는 슬픔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토록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애인과 시시껄렁한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사람들의 이해를 받을 수 없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 집단적 시선에 길든다. 그래, 사람들은 나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나 또한 이해받기 위해 어설프게 노력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친구’를 찾고 있다. 가족 같은, 아니 가족 자체가 되어버린 늙은 개를 잃어버린 살라마노 영감. 그리고 여자친구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배신당하여 끔찍한 분노에 사로잡힌 레이몽. 살라마노 영감의 상실감과 레이몽의 분노는 사실 뫼르소가 결코 표현할 수 없었던 자신의 숨김없는 감정의 대체재가 아니었을까. 그는 다른 어떤 이웃들과도 어울리려 하지 않지만, 오직 살라마노 영감과 레이몽만을 자기 삶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비극의 신호탄이 되는지도 모른 채.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건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 그러자 마리는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보는 듯 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길이 없었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54~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