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제 몸이 아프다고 연락하면 어떨까?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궁색하고도 수상쩍은 변명이 될 것이다. 그 회사에 오 년이나 근무하는 동안 그레고르는 아직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틀림없이 의료보험조합에서 나온 의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게으른 아들을 두었다고 부모님께 비난을 퍼부어댈 것이고 의사의 말을 빌려 어떤 이의도 묵살해버릴 것이다. 의사가 보기에는 건강하면서도 일하기 싫어 아픈 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을 테니까. (…) 어느새 아버지가 한쪽 옆문을 약하게, 하지만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레고르, 그레고르! 대체 무슨 일이냐?”
(…) 아버지는 아침식사를 하러 돌아갔으나 여동생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오빠, 문 좀 열어요. 제발 부탁이야.”-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12~14쪽.
온몸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렸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그레고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음에도 슬픔은커녕 무심하기 그지없는 뫼르소. 이들이 겪고 있는 영혼의 불감증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른바 감정의 기복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 연출된 ‘쿨함’도 아니다. 그들은 정말 마음속 깊이 슬픔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천천히 이들의 이야기를 더듬어 읽다 보면, 이것은 ‘슬픔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레고르는 온몸이 벌레로 변한 자신의 상황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이것은 과로로 인한 단순한 환각 상태라고 치부해버리며 몇 시간째 벌레가 된 그 몸으로 출근 준비에 안간힘을 쓴다. 뫼르소는 어머니 외에는 자신을 ‘이 세상’과 연결해주는 끈이 아무도 없음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연습해 온 사람처럼 소름 끼치는 무덤덤함으로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좀처럼 다른 감정으로 대체할 수 없는, 깊고도 질긴 슬픔의 여운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슬픔이란 충격이나 고통처럼 즉각적인 감정이 아님을. 슬픔을 느끼는 데는 상황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며,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거리 감각이 필요하다. 너무 커다란 슬픔 앞에서는 슬픔을 느끼는 감각조차 마비되어 버린다. 부모형제조차 도저히 눈뜨고는 봐 줄 수 없는 끔찍한 벌레가 되어버렸는데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이들. 그들은 진정 슬프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슬픔을 느끼는 감성의 촉수 자체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뿐이다. 그레고르는 정시출근이라는 지상명령에 마비되어 자신을 돌보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는 벌레가 된 채로 여전히 노동의 의무, 가장의 의무를 짊어지려 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규범화된 감성의 지침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위험인물로 낙인찍힌다. 남들처럼 슬픔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 자기 안에 깊이 침잠하여 슬픔으로부터 도피해버림으로써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류의 공동체 문화가 개발한 ‘애도의 의례’에 참석하지 않은 채, 그들은 오직 자신만의 감정 취급 매뉴얼을 작동시킨다. 규범화된 감정의 매뉴얼에 동참하지 않고, 오직 자기 안의 감성, 자기 안의 욕망, 자기 안의 지침만을 따르려 한다. 이것이 그들의 ‘죄’라면 죄일까.
그레고르는 자신의 안위보다 자신의 출근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직 출근, 정시출근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수많은 다리들을 버둥거리며 침대 속을 빠져나오려 하지만, 쉽게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의 거대한 벌레 몸집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망연자실 한다. 벌레의 외모로는 출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픈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정시에 출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슬픈 것일까. 뫼르소가 겪고 있는 영혼의 불감증은 한층 더 심각해 보인다. 그는 슬픔을 표현하는 그 어떤 행위도, 마치 처음부터 금지되어 있다는 듯이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사람들의 의례적인 애도의 인사에도 감정 동요가 없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 자체에 아예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카프카의 『변신』이 이게 ‘정말 현실일까 환상일까’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면, 카뮈의 『이방인』은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마랭고 양로원에서 그가 문지기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 혹시 누가 말했더라면, 아마 그는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의 나이는 예순네 살이며 파리 태생이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말했다. “아! 이 고장 분이 아니시군요?” (…)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산이 없는 평지는, 더구나 이 지방은 날씨가 몹시 더우니까 서둘러 매장을 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가 자기는 파리에 살았었고, 파리는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고 내게 알려준 것도 그때였다. 파리에서는 시체를 사흘씩이나 묻지 않고 두는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실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벌써 영구차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만둬요. 그런 얘기는 이분에게 할 게 아니에요.” 영감은 낯을 붉히고 사과를 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아니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하고 말했다. 나는 문지기의 이야기가 맞고 또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