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vs 『1984』 ⑤
만질 수 없는 현실, 닿을 수 없는 세상
소마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적인 힘에 의존한 채 어떤 크나큰 시련이나 고통이나 어떤 박해에 직면한다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버나드는 전에 여러 번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고통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1주일 전만 해도 소장실에서 자신이 용감하게 반항하고, 한마디
하지 않고 초연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장면을 상상했었다. 소장의 협박은 사실상 그의 의지를
고취시켰으며 자신이 실제보다 커졌다는 느낌을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은 것은
모든 게 소장의 협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막상 닥치면
소장도 그 어떤 조치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협박이 현실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많아지자 버나드는 겁이
났다. 단지 상상적 금욕주의라든가 이론적 용기는 이제 흔적도 없어졌다.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1998, 130쪽.
어떤 출구나 틈새도 없어 보이는 멋진 신세계에도 미세한 균열은 있다. 개발 가치가 없는 야생의 공간, 멋진 신세계로 동화시킬 수 없는 야만인들의 존재야말로 멋진 신세계의 ‘더러운 빨래’다. 그 숨기고 싶은 아킬레스건이야말로 해방의 출구가 될지도 모른다. 버나드는 멋진 신세계에서 도저히 진정한 엘리트로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그 야만의 공간에 눈길을 돌린다. 멋진 신세계의 세련된 인간 제조법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 접촉으로 태어난 야만인들이 사는 위험지역으로 탐험을 떠난 버나드. 그는 마침내 ‘흥미로운 야만인’ 존을 찾아내 멋진 신세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첫 번째 접촉을 시도한 버나드의 용기는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다. 사람들은 마치 멸종 위기의 원숭이가 벌이는 마지막 서커스를 구경하듯 존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한다.
멋진 신세계 사람들에게 소마는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환각제다. 소마 1그램이면 웬만한 근심, 걱정, 우울이 말끔히 사라지는 멋진 신세계. 그곳에서는 ‘현실’이야말로 억압의 대상이다. 멋진 신세계의 ‘루저’ 버나드는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나드는 자신의 열등감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자 그를 더없이 빛나게 했던 진짜 고뇌를 망각해버린다. 그 고뇌는 바로 이 멋진 신세계가 ‘진짜 현실’로부터 모든 인간을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 즉 멋진 신세계에서는 역사는 물론이고 살아 꿈틀거리는 현실 자체가 엄격히 통제된다는 것이었다. 버나드가 야만인들의 게토에서 찾아낸 야생의 인간 존이야말로 이 잔인한 ‘현실 통제’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투쟁을 시작할 진정한 혁명가로 발돋움한다.
조지 오웰의『1984』에서는 이러한 ‘현실 통제’를 ‘이중사고’라고 부른다. ‘현실 통제’라는 말조차 체제를 위협하는 도화선이 될 수 있으니, 그 억압적 뉘앙스를 지우고 ‘이중사고’라는 중립적인 단어가 권장된다. 이중사고는 결국 알면서도 모르는 인간, 정반대의 의견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 인간, 그 어떤 것도 신념으로 삼을 수 없기에 결국 아무 것도 실천할 수 없는 인간들을 대량생산해낸다. 과거는 손쉽게 말살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개개인의 꿈은 처참하게 짓밟힌다. 기억하면서도 망각하는 인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인간, 악의 횡포에 질끈 눈감는 인간이『1984』의 ‘적자’들이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각 개인의 기억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현실 통제’이며 신어로는‘이중사고’라 불린다.
(……) 윈스턴의 생각은 이중사고라는 미로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알면서도 모른다는 것, 완벽한 진실을 인식하면서도 잘 꾸며진 거짓을 말하는 것, 상반된 두 견해를 동시에 갖는다는 것,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둘 다 믿는다는 것, 논리를 논리로 반박한다는 것, 도덕성을 부정하면서도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도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다는 것, 잊어야 할 것을 미련 없이 잊어버리고 필요하다면 다시 기억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리고 다시 즉석에서 잊어버리는 것, 또한 무엇보다도 특정한 과정에 동일한 과정을 적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교함의 극치이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조장하고 자신이 방금 행한 자기최면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이중사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조차 이중적인 사고를 요한다.
-조지 오웰, 이기한 옮김,『1984』,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