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통화한 대학 선배가 제게 이렇게 안부를 묻더군요. “요즘 미술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지? 발로 뛰며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들더라.” 선배 말이 맞습니다. 미술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미술관을 발로 뛰어다니며 배운 것이니까요. 연재 제목을 「발로 뛰며 배운 미술」로 바꿔 볼까요? 물론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미술 비디오가 가장 유용한 미술 선생님입니다. 날마다 미술관을 뛰어다니진 못하지만 집에서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매일 미술 비디오를 보는 건 가능하니까요. 열심히 미술 비디오를 보다 보니 이제는 영화보다 미술 비디오를 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최고의 미술 선생님은 여전히 미술관입니다. 영상으로 작품을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많이 다르니까요. 오로지 미술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작품 사진으로는 작품 크기를 정확하게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이나 글에 똑같은 크기로 실린 작품 사진을 보면 어느 작품이 더 큰지 알 수가 없죠. 작품 사진 밑에 작품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엄청나게 클 것 같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von Willendorf』약 25,900년 전는 높이가 겨우 11.1cm이고, 중학교 때 국사책 표지에 큼지막하게 나왔던 『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고려 12세기는 높이가 15cm밖에 안 되더군요. 하루 3만 명연간 750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작품, 『모나리자Mona Lisa』1503는 높이 77cm에 폭이 53cm에 불과합니다. 파리행 비행기에서 제 옆자리에 앉았던 브라질 승객은 직접 본 『모나리자』가 너무 작아서 “나머지는 어디에 있어?”라고 동행한 친구에게 물었다고 하더군요. 『모나리자』의 맞은편 벽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큰 작품인 파올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의 『가나의 혼인 잔치Nozze di Cana』1562~1563가 걸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높이 6.77m에 폭이 9.9m에 달합니다. 사진으로는 이 작품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석굴암 『본존불』통일신라시대도 사진으로는 아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높이가 3.4m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입니다.
『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 고려 12세기. 청자, 높이 15cm.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
파올로 베로네제, 『가나의 혼인 잔치』, 1562~1563년. 캔버스에 유화, 677 × 990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미술관을 발로 뛰어다니며 직접 작품을 보게 되면 인쇄매체나 인터넷 사진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색감이나 질감, 입체감 등도 놓치지 않아서 좋습니다. 인쇄매체나 인터넷 자료는 원작의 색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이탈리아어: 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전시회2015년에서 『십자가가 있는 장-밥티스트 알렉상드르의 초상Portrait de Jean-Baptiste Alexandre au Crucifix』1909 속 초록색에 반해 전시회 도록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도록을 펼쳐보니 아름답고 밝은 초록색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우중충한 검은색이 자리 잡고 있더군요. 물론 원작의 색감을 완벽하게 재현해서 인쇄된 책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작품 사진들도 어떤 것은 너무 환하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어두워서 같은 작품인지 의심될 정도고요. 그나마 원작에 가까운 색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미술관에서 직접 찍어온 작품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로 감상하는 겁니다. 임파스토Impasto 기법으로 물감을 두텁게 칠한 작품은 사진으로는 그 질감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를 좋아하는 제 친구는 두껍게 칠한 물감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이 달라 보인다며 고흐의 작품은 꼭 실물로 볼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곤 합니다. 또 조각 작품은 어떻고요. 아무리 잘 찍은 사진도 조각 작품의 양감과 질감, 입체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질감 표현의 최고봉으로 저는 조반니 베르니니Giovanni Bernini, 1598~1680의 『페르세포네의 납치이탈리아어: Ratto di Proserpina』1621~1622를 꼽곤 합니다. 페르세포네의 허벅지와 허리에 난 하데스의 손자국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진짜 대리석이 맞는지 눌러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솟구치죠. 사진으로는 그 질감을 전달하기에 역부족입니다. 보는 위치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 옵 아트Op Art 작품이나 왜상 화법Anamorphosis 작품도 발로 뛰며 미술관에서 직접 봐야 합니다. 앞글,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대사들The Ambassadors』1533은 보는 위치에 따라 그림 전면의 해골 형상이 달라집니다. 이런 예들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발로 뛰진 않더라도 미술관에 가서 천천히 걸으며 작품을 직접 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지 않나요?
조반니 베르니니, 『페르세포네의 납치』, 1621~1622년. 대리석.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아니쉬 카푸어, 『육각 거울』, 2009년. 스테인리스 스틸. 리움미술관, 서울. |
오늘의 궁금증도 미술관에서 발로 뛰어다니다 생긴 겁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궁금해하지 않았을 문제죠. 먼저 세 작품을 보고 이상한 점을 한 번 찾아보세요. 첫 번째 작품은 마르텐 반 헴스케르크Maarten van Heemskerck, 1498~1574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마리아 막달레나, 아리마테아의 요셉이 있는 세 폭 그림Triptych with the Deposition, Mary Magdalene and Joseph of Arimathea』16세기이고, 두 번째 그림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1486~1530의 『성 가족The Holy Family』1529입니다. 세 번째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이고요. 먼저 제가 찍은 그림의 부분 사진을 보여 드리고 나서 전체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나리자』는 유리막으로 가려놓은 데다 관람객들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르텐 반 헴스케르크,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마리아 막달레나, 아리마테아의 요셉이 있는 세 폭 그림』, 1540~1550년. ________에 유화, 220 × 149 cm.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고전 미술관, 로마. 아래 사진 https://www.barberinicorsini.org/artwork/?id=WE4099 제공. |
안드레아 델 사르토, 『성 가족』, 1529년. _______에 유화, 140 × 104 cm.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고전 미술관, 로마. 아래 사진 https://www.wga.hu/html/a/andrea/sarto/3/holyfamy.html 제공. |
제가 찍은 앞 사진과 인터넷에서 공유한 뒤 사진의 톤이 너무 다르죠? 색이 진하지 않은 작품은 사진을 어둡게, 색이 어두운 작품은 사진을 밝게 바꿔놓은 것 같아요. 작품이 더 선명하게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겠죠? 첫 번째 그림에서는 중간에 세로로 여러 줄의 갈라진 틈이 드러나 보이고, 두 번째 그림에서는 가운데에 갈라진 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쪽 끝이 휘어져 있습니다. 세 번째 그림에서도 모나리자의 이마 위로 갈라진 틈이 보이죠? 사실 『모나리자』를 직관했을 때는 이마 위에 금이 간 줄도 몰랐습니다. 그림이 작은 데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으니까요. 미술관에서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을 보다가, 인터넷에서 『모나리자』를 보다가 궁금해졌습니다. ‘어, 이 그림은 왜 갈라진 거야? 왜 그림이 휘었지? 캔버스가 아니야? 도대체 이 그림을 어디에 그린 거야?’ 이 세 작품은 어디에 그린 걸까요? 위 작품 정보에서 재료 부분의 빈칸에 바탕 재질이 무엇인지 채워보시길 바랍니다.
1. 캔버스
2. 종이
3. 비단
4. 동판
5. 패널
캔버스나 종이, 비단은 저렇게 금이 생기진 않겠죠? 동판이 갈라지거나 휠까요? 그런데 동판에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까요? 금속판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간혹 그런 그림을 만나기도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빈 미술사박물관 특별전」2022에서도 동판 그림을 두 점 발견했습니다. 얀 브뤼헐 1세Jan Brueghel the Elder, 1568~1625의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Rest on the Flight into Egypt』1595년경과 롤란트 사베리Roelant Savery, 1576~1639의 『벌목꾼이 있는 산 풍경Mountain Landscape with Woodcutters』1606~1607이 동판에 그린 그림이더군요. 겉보기에는 캔버스나 패널에 그린 그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판 표면을 사포로 잘 문지른 다음 초벌 칠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 된답니다.
얀 브뤼헐 1세,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 1595년경. 동판에 채색, 25 × 19 cm. 빈 미술사박물관, 빈. |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캔버스나 종이, 비단이나 동판이 갈라지거나 휘지 않는다면 답은 5번이겠죠? 그런데 ‘패널panel’이 무엇인지 아세요? 흔히 ‘판넬’이라 부르죠. ‘패널’은 평평한 나무 화판으로, 때로는 한 조각으로, 때로는 여러 조각을 이어 붙여서 만들기도 합니다. 보통 ‘패널 그림’ 혹은 ‘패널화’라고 하면 ‘나무에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작품 캡션에 ‘패널에 유화oil on panel’ 혹은 ‘나무에 유화oil on wood’라고 적혀 있으면 모두 나무에 그린 유화입니다.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고전 미술관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in Palazzo Barberini, 줄여서 바르베리니 미술관에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의 작품 캡션에는 이탈리아어 ‘tabola’와 영어 ‘panel’이 병기돼 있더군요. 사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모나리자』의 작품 캡션을 보지 봤습니다. 작품 가까운 곳 어딘가에 작품 캡션이 있었겠지만, 인파에 떠밀려서 작품 캡션을 찍을 겨를이 없었죠. 「위키피디아」 프랑스어판 작품 설명에는 ‘huile sur bois peuplier,’ 즉 ‘(포플러) 나무에 유화’라고 나무의 종류가 더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bois’는 ‘나무’입니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포플러 패널에 유화oil on poplar panel’로 돼 있는 걸 보면 ‘나무wood’와 ‘패널panel’이 대개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면이 평평하지 않은 경우에는 ‘패널’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같아요. ‘패널’은 ‘나무’ 중에서 평평한 나무판만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가 패널 그림이라는 사실이 저한테는 조금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모나리자의 이마 위에 있는 갈라진 틈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모나리자』의 바탕 재질이 당연히 캔버스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모나리자』가 나무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궁금한 게 더 생기더군요. 1911년에 『모나리자』를 도난당했다가 2년 3개월 만에 되찾은 사건에 대해서는 다 아시죠? 그런데 『모나리자』가 캔버스 그림이 아니라면 도대체 빈센조 페루자Vincenzo Peruggia는 어떻게 『모나리자』를 작업복 밑에 숨겨서 나갈 수 있었을까요? 캔버스 그림이라면 액자에서 그림 부분만 잘라낸 다음 돌돌 말아서 옷 밑에 숨겨 나갈 수 있었겠지만, 77cm나 되는 나무 화판이라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패널 그림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 저는 작품 캡션을 보기 전에 그림의 바탕 재질을 추측해 보곤 합니다. 물감을 얇게 바른 부분에 헤링본이나 마름모, 사각형 모양의 직조 패턴이 보이는 경우나, 그림 끝부분이 동그랗게 휘어져 있거나 패널 이음새 부분이 벌어져 있는 경우에는 캔버스 그림인지, 패널 그림인지 구분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패널 그림 같아서 작품 캡션을 살펴보면 캔버스 그림이고, 캔버스 그림 같아서 작품 캡션을 보면 패널 그림인 경우도 있더군요. 저 같은 미술 초보에게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무 조각 위에 도금한 목조도금불상과 금동불상을 구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몇 가지 예외가 있더군요. 먼저, 이콘의 경우에는 미술 초보라도 쉽게 바탕 재질을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이콘icon은 예수와 성모,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을 그린 성화聖畵입니다. 글을 몰라서 성서를 읽을 수 없었던 중세 민중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죠. 이콘은 금속이나 돌, 천이나 종이에 그리기도 하고, 모자이크나 프레스코로 그리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참피나무나 소나무 패널에 그린다고 합니다. 이콘에서는 그림 부분과 테두리가 분리되지 않아서 미술 초보라도 나무판 위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무판 위에 테두리 부분은 남겨둔 채, 그림을 그릴 부분을 파낸 다음 낮은 부분에 그림을 그리니까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러시아 이콘 : 어둠을 밝히는 빛」 전시회2021에 전시된 러시아 이콘을 보면 15~16세기 이콘부터 19세기 이콘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무 패널을 사용했더군요. 이콘의 보고寶庫인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Tretyakov 미술관 지하에는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70의 『삼위일체러시아어: Троица』1425를 비롯해 수많은 이콘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 전시관에서도 캔버스에 그린 이콘을 보지 못했습니다. 캔버스가 발명된 이후에도 이콘은 패널을 고집했고, 그 덕분에 저 같은 미술 초보도 이콘 하면 패널 그림이라는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1411년 혹은 1425~1427년. 패널에 템페라, 142 × 114 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
그림의 바탕 재질이 나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로는 미라 관에 그린 그림과 관 속에 들어있는 미라 초상화가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기원전 10세기경에서는 사람의 몸 형태로 나무 관을 짠 다음 그 위에 얼굴과 여러 가지 이미지를 화려하게 조각하고 채색해서 미라 관을 장식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미라 관들을 보면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료시카러시아어: Матрёшка를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미라 관을 장식하고 있는 채색 그림은 패널 그림도 있고, 아닌 것도 있습니다. 아래 관 그림에서 첫 번째 평평한 관 그림은 패널 그림이고, 두 번째 둥근 관 그림은 나무에 채색한 그림입니다.
메레사문 관과 미라, 나무에 다채색. 고대 문화 연구소 박물관, 시카고 대학교, 일리노이. https://worldhistorycommons.org/egyptian-mummy-coffin 제공. |
반면에 관 속의 미라 얼굴 위에 올려놓는 미라 초상화들은 직사각이나, 직사각에 어깨 모양을 덧댄 형태의 나무판 위에 그린 패널 그림입니다. 이 미라 초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파이윰Fayum 미라 초상화입니다. 파이윰 초상화란 이집트 콥트기1세기 중엽부터 이집트에서 그리스정교회 또는 동방정교회가 확산된 시기에 죽은 사람의 얼굴을 나무 패널 위에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서 미라의 얼굴 위에 올려놓는 초상화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 초상화만 미라의 얼굴에서 떼어내서 벽면에 전시하죠. 그런데 간혹 누워 있는 미라 위에 이 초상화를 올려놓은 상태로 전시하기도 합니다. 수의를 입은 미라의 얼굴 부분 위에 생생한 얼굴 초상화가 놓여있으면 섬뜩한 기분이 들죠. 벽에 걸려 있으면 그냥 초상화 작품 같지만, 원래의 위치인 미라의 얼굴 위에 놓여있으면 너무 생생하게 그려진 초상화 때문에 미라가 벌떡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젊은 여성의 미라 초상화, 2세기. 보스턴 미술관, 보스턴. 왼쪽 사진 https://collections.mfa.org/search/objects/*/mummy%20portrait 제공. |
어린 소년과 젊은 여성의 미라 초상화, 2세기. 루브르 박물관, 파리. |
파이윰 초상화는 약 900점 정도가 남아 있는데, 대영 박물관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 등 유럽과 미국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맨 처음 파이윰 초상화를 본 곳은 빈의 미술사박물관이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 유물 전시실의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여러 점의 초상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더군요. 우선, 다른 회화 작품이 정교하게 제작된 액자에 끼워져 전시되는 것과 달리 이 초상화들에는 액자가 없었습니다. 또한 나무 패널이 반듯한 직사각형 형태가 아니라 가장자리가 살짝 삐뚤빼뚤했고 윗면은 양쪽 모서리가 사선으로 잘려있거나 동그랗게 잘려져 있었죠. 아래 삼면은 어느 정도 직선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윗면의 모양은 제각각이더군요. 그런데 그림의 크기는 비슷했습니다. 파이윰 초상화는 얼굴 마스크용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얼굴을 가릴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보통 가로 30cm, 높이 40cm 정도여서 웅장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죠. 그래도 비슷한 크기와 형태의 패널 위에 비슷한 색감으로 그려진 남성과 여성의 초상화들이 여러 점 함께 걸려 있으니까 독특하고 신비로웠습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입니다. 젊어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생전에 젊었을 때 미리 초상화를 그려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들 젊고 아름다웠죠. 또한 2천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색감이 선명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너무나 사실적인 얼굴 모습이었습니다.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그려진 머리카락과 수염부터 큰 눈 속의 동공에 반사된 반짝이는 빛까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습니다. 이 초상화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초상화들처럼 섬세하고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강렬한 눈빛만큼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반듯하게 정리되지 않은 모서리와 세로로 길게 나 있는 갈라진 틈새들 덕분에 이 파이윰 미라 초상화들은 미술 초보라도 바탕 재질이 나무 패널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림 형태 중 하나입니다.
젊은 남성과 여성의 미라 초상화, 117~138년. 빈 미술사박물관, 빈. |
나무 패널 그림은 대부분 작품 캡션에 ‘나무에 유화’ 혹은 ‘패널에 유화’로 소개되지만, 미술관에 따라 목재의 종류가 상세하게 표기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의 경우에는 ‘포플러 패널에 유화’라고 적혀 있죠.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전시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남자의 초상 [자화상?] Portrait of a Man [Self Portrait?]』1433 캡션에는 ‘참나무에 유화oil on oak’라고 작품 재료가 명시되어 있고요. 이런 작품 캡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나무 패널의 재료는 참나무나 포플러를 포함해서 너도밤나무나 삼목, 밤나무, 전나무, 낙엽송, 참피나무, 마호가니, 올리브, 월넛, 티크 같이 잘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목재입니다.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패널을 삶거나 쪄서 수지를 제거한 다음 아교를 발라서 구멍을 메우고 석고를 바르면 나무 화판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얀 반 에이크, 『남자의 초상 (자화상?)』, 1433년. 참나무에 유화, 26 × 19 cm. 국립 미술관, 런던. |
운이 좋으면 미술관에서 패널 그림의 민모습이나 뒷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스턴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는 작품 복원 전문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관람객들이 볼 수 있도록 복원실을 공개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보스턴에 살고 있는 친구가 들려준 소식에 의하면, 최근에 복원실이 비공개로 바뀌었답니다. 여러 폭으로 된 제단화 보수 과정을 직관할 수 있었던 저는 운이 좋았던 거죠. 복원 전문가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도금 장식 액자를 모두 떼어내고 기다란 나무 패널 그림들만 집게로 걸어둔 채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액자를 떼어낸 상태에서는 그림의 바탕 재질이 나무라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더군요. 보스턴 미술관에서 본 패널 그림들은 폭이 좁고 긴 나무 패널 한 개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면에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여러 조각 나무 패널을 연결해서 만든 거대한 패널 그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높이 3m에 폭이 2m가 넘는 이 그림들은 여러 조각의 나무 패널을 연결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벌어지거나 휘지 않도록 뒷면에 지지대를 덧대거나 쐐기를 박아뒀더군요. 우피치 미술관에는 중세 화가로 분류되는 두초 디 부온인세냐Duccio di Buoninsegna, 1255~1318와 조반니 치마부에Giovanni Cimabue, 1240년경~1302년경, 르네상스 초기 화가인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가 그린 성모자상들을 한 공간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이 있습니다. 이 패널 그림들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벽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개의 쇠막대기로 그림을 벽에 고정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뒤쪽으로 지나다닐 수는 없죠. 그래도 패널의 두께를 살펴보고 지지대를 덧댄 뒷면도 구경할 수는 있습니다. 우피치 미술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작품들이 복원 중이라 이 전시실 전체가 폐쇄됐기 때문에 두 번째 방문 때에야 이 작품들을 직관할 수 있었습니다. 관람객들로 붐비는 전시실에서 조토의 『옥좌의 성모상』 뒷면을 열심히 사진 찍고 있는데 삐 경보음이 울리더군요. 뒷면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찍어보겠다는 욕심에 제가 그림에 너무 바짝 다가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저처럼 규정을 어기고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패널 그림의 뒷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보스턴 미술관의 복원실 모습. |
조토 디 본도네, 『옥좌의 성모』, 1306년. 패널에 템페라, 325 × 204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옥좌의 성모』 뒷면. |
그림의 제작 연도를 알면 바탕 재질이 패널인지, 캔버스인지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인 두초, 치마부에, 조토의 작품 중에는 캔버스로 그린 그림이 없습니다. 이 화가들은 패널 그림과 프레스코를 주로 그렸죠. 왜 그랬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이 화가들이 활동했던 시기에는 아직 캔버스가 그림의 바탕 재질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나 대마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캔버스는 15세기 후반부터 그림의 바탕 재질로 이용되기 시작해서 16세기에 가장 인기 있는 바탕 재질로 자리를 잡습니다. 패널 그림은 대형 패널을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목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이동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습기, 건조함, 흰개미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여러 단점이 있었죠. 프레스코 역시 회벽이 마르기 전에 신속하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고요. 물론 캔버스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에도 패널 그림이나 프레스코화를 그린 화가들이 있습니다. 렘브란트1606~1669나 루벤스1577~1640 같은 화가들은 17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패널 그림을 그렸고,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는 18세기에도 뷔르츠부르크 공관Würzburg Residenz에 프레스코 천장화1752를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기동성과 휴대성, 편리성을 모두 갖춘 캔버스는 유화의 발명과 결합해서 ‘캔버스에 유화’라는 일반적인 미술 재료의 공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패널과 회칠한 벽, 캔버스 이외에 그림의 바탕 재료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동굴 벽화에 대한 글에서 이미 다뤘듯이 2, 3만 년 전의 선사시대 사람들은 바위와 돌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식물의 잎이나 줄기도 그림의 바탕 재료가 됐고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얇게 벗겨서 엇갈리게 겹쳐 놓고 압착한 다음 그 위에 글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렸답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미라와 함께 관 속에 매장한 사후세계 안내서인 『사자의 서영어: Book of the Dead』가 파피루스에 그린 그림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자의 서』는 교훈이나 주문呪文 등을 상형문자로 기록한 것으로 문자 그림이라 할 수 있죠. 인도에서는 경전 삽화인 세밀화miniature painting를 초기11세기경에는 야자나무 잎 위에 그렸다가 나중에는 종이를 이용했습니다.
『사자의 서』, 기원전 1275년. 파피루스, 39.8 × 550 cm. 대영 박물관, 런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D_Hunefer.jpg#/media/파일:BD_Hunefer.jpg 제공. |
『신도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녹색의 타라 보살』, 12세기 초. 야자수 잎에 수채, 그림 부분 6.4 × 4.9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ET_DP238217.jpg#/media/File:MET_DP238217.jpg 제공. |
소, 양, 염소, 사슴 같은 동물의 가죽 역시 그림의 중요한 바탕 재료였습니다. 『베리 공작의 성무일도서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1404~1409와 『베리 공작의 매우 화려한 성무일도서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1412~1416는 양피지羊皮紙-송아지 가죽으로 제조로 만든 중세 최고의 채색필사본으로, 랭브르Limbourg 삼 형제가 그린 화려하고 아름다운 삽화로 유명합니다. 유리나 금속, 도자기도 그림의 바탕 재료로 사용되고요. 마르셸 뒤샹의 『큰 유리 혹은 구혼자들에게조차 발가벗겨진 신부The Large Glass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1915–23』는 유리에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무수한 그림의 바탕 재료 중 캔버스가 대세가 됐다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종이와 비단이 가장 일반적인 바탕 재료로 자리 잡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회화관만 돌아봐도 이런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죠. 작자 미상의 『박회수 초상화』1833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전에 제작된 국내 회화 작품 중에서 비단이나 종이를 바탕 재료로 사용하지 않은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한 그림들에는 대개, 아니 모두, ‘비단에 채색Color on silk’ 혹은 ‘종이에 채색Color on paper’이라는 작품 캡션이 붙어 있었습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는 ‘견본채색絹本彩色’ 혹은 ‘지본채색紙本彩色’이라는 용어를 쓰더군요. 중국에서 비단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기원전 1042년~기원전 223년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단에 그린 장례 의식용 그림인 백화帛畵가 초나라 시대 무덤에서 발견됐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서는 비단이 들어오기 시작한 고려시대에 비단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그려진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중 현재 4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불화나 조선시대 초상화는 부드럽고 얇은 비단의 질감을 살려서 화면의 뒷면에 색을 칠해 앞면에 비치도록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했습니다. 배채법은 패널이나 종이, 혹은 거칠고 두꺼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는 절대 쓸 수 없는 기법이죠. 종이는 비단보다 조금 늦게 중국의 전한前漢 시대기원전 50~40년대에 발명됐고, 105년경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에 의해 품질 좋은 종이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4~7세기 초에 종이 제조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럽에서는 캔버스가 나무 패널을 밀어내고 그림의 바탕 재질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동양권에서는 종이가 가장 일반적인 바탕 재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림의 바탕 재질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이 생겨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바탕 재질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종이와 비단은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6, 7세기가 되어서야 서양에 전파됐으니까요. 서양에서는 대신 나무 패널 그림과 모자이크, 프레스코가 발달하게 됐죠. 안료가 바탕 재질에 잘 접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유화 물감이 만들어졌고, 다음에는 유화 물감이 잘 접착할 수 있는 더 좋은 바탕 재질로 캔버스가 만들어지고요. 이런 식으로 연쇄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리는 경우, 계속 덧칠이 가능하다 보니 서양에서는 선보다는 명암이나 색이 더 강조되는 결과가 만들어졌죠. 반면에 화선지나 비단에 그림을 그리는 동양에서는 붓이 닿는 순간 먹이 바탕에 바로 스며들어 버립니다. 한 번 그리면 고치기가 어려워지는 거죠. 그래서 종이나 비단에 넓게 칠하는 작업보다는 가는 선으로 대상을 표현한 다음 대상을 먹의 농담이나 옅은 색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발달합니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바탕 재질의 차이가 동양 미술과 서양 미술의 차이를 만들어 낸 출발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월관음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채색, 172 × 63 cm.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신윤복, 『미인도』, 1758~1813 이후. 견본채색, 114 × 45.5 cm. 간송미술문화재단, 서울. |
이인상, 『옥류동』, 1737년 이후. 지본담채, 34 × 58.5 cm. 간송미술문화재단, 서울. |
그림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저 같은 미술 초보는 그림은 캔버스나 종이에 그리는 것이라는 단순화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술관에서 캔버스나 종이가 아닌 바탕 재질에 그려진 그림을 접할 때면 ‘어, 이런 데다 그림을 그렸네!’라고 놀라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BBC의 『인문학과 과학 동영상들Films for Humanities & Sciences』 중 「미술 매체Medium」2003에 대한 동영상에 의하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림의 바탕 재질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캔버스나 종이 위가 아닌 다른 곳에 그려진 그림을 보게 되더라도 너무 크게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