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 같이 파리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있을 때 스위스에 사는 선배 지인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밤까지 기차로, 비행기로, 이 도시, 저 도시로 미술관을 찾아다니느라 며칠 동안 선배 지인을 만나질 못했습니다. 선배 지인이 스위스로 돌아가는 날 아침에야 겨우 호텔 로비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죠. 잠시 후 미술관에 가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는 저를 보고 선배 지인이 그러더군요.
“‘뮤지엄 넌museum nun이 될 시간이군요.” (아마도 저를 보고 웬디 수녀님이 생각났나 봅니다. 제 옷이 검은색이라 더 그렇게 보였을 거예요.)
“‘뮤지엄 넌’이 되고 싶진 않아요. ‘뮤지엄 웜museum-worm’이 되는 건 괜찮겠네요. 그럼 저는 ‘뮤지엄’ 안을 ‘기어다니러’ 이만 가보겠습니다.”
‘책벌레book-worm’라는 단어에 착안해서 ‘미술관 벌레museum-worm’라는 단어를 만들어 봤습니다. 제가 ‘아재 개그’를 많이 좋아합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저는 어른벌레가 되려면 한참 자라야 하는 애벌레였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면서 한참 더 공부하고 나면 번데기를 거쳐 언젠가는 나방이 되어 날아오르지 않을까요?
아직 ‘미술관 애벌레’는커녕 겨우 ‘알’ 상태였을 때, LA의 J. 폴 게티 미술관the J. Paul Getty Museum에서 바르톨로메오 카바로치Bartolomeo Cavarozzi, 1587~1625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엠마오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을 봤습니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보니 당시만 해도 저는 『엠마오의 만찬』을 그린 화가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한 사람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카라바조가 『엠마오의 만찬』을 그렸다는 것은 번역하다가 알게 됐거든요. 그런데 게티 미술관에 카라바조가 아닌 다른 화가가 그린 『엠마오의 만찬』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니, 왜 카라바조의 그림 제목을 다른 화가가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거지? 이건 표절 아닌가?’ 분기탱천한 저는 전시실에서 근무하던 자원봉사자 어르신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엠마오의 만찬』은 카라바조의 작품인데 여기에 다른 화가가 그린 『엠마오의 만찬』이 있어요. 다른 화가의 그림 제목을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괜찮은 건가요?”
자원봉사 어르신 역시 미술에 관한 한 저와 마찬가지로 ‘알’ 상태였기 때문에 제 궁금증을 해결해 주진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만찬』과 게티 미술관에 있는 『엠마오의 만찬』 외에도 『엠마오의 만찬』이 여러 점 있더군요. 카라바조만 해도 『엠마오의 만찬』을 두 점이나 그렸고요. 한 점은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다른 한 점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에 있습니다.
위 그림 – 카라바조, 『엠마오의 만찬』, 1601년. 캔버스에 유화, 141 × 196.2 cm. 국립미술관, 런던. / 아래 그림 - 카라바조, 『엠마오의 만찬』, 1606년. 캔버스에 유화, 141 × 175 cm.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
두 그림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니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 속 예수의 모습이 더 나이 들어 보이죠? 위 그림을 그리고 나서 오 년 후에 아래 그림이 완성됐는데 아무래도 그 오 년의 시간이 예수의 얼굴에 반영된 것처럼 보입니다. 청년 예수가 장년 예수로 변모한 거죠. 아래 그림 속 예수가 훨씬 더 차분하고 사색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어쩌면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카라바조가 위 그림을 그렸을 때 30세였고 아래 그림을 그렸을 때는 35세였으니까요. 「위키피디아」의 『엠마오의 만찬』 리스트에는 16점이 올라와 있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15761535,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1625, 렘브란트 판 라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 1648 같은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엠마오의 만찬』을 그렸더군요. 다른 성서 주제를 그린 그림들에 비하면 16점은 많은 편이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가 두 제자와 식사를 하며 자신의 부활을 알리는 ‘엠마오의 만찬’ 주제가 다른 주제들에 비해 인기가 조금 덜 했을까요?
어쨌든 『엠마오의 만찬』이 16점이나 있는 걸로 봐서는 작품 제목이 같아도 괜찮다는 말이겠죠? 맞습니다. 혹시 16, 17세기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괜찮았던 게 아니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1474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저작권법이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저작권법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같은 제목의 작품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것이 저작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작품 제목이 똑같아도 표절이 아니랍니다. 제목에는 창작성이 많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작품 제목을 다른 작품에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혹시 미술작품 외에도 노래나 드라마, 영화의 제목이 똑같다 해도 저처럼 분개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미술관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같은 제목의 그림들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면, 기독교 주제를 다룬 종교화 중에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들이 가장 많은 것 같아요. 기독교가 313년에 공인된 이후 중세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를 지배해 왔으니까요.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기독교와 연관된 작품들이 예술 분야를 독점하다시피 했죠. 르네상스에 이르러야 비로소 보통 사람들이 미술작품의 주인공으로 조금씩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성서 속 인물이나 성자들, 혹은 성직자들 위주의 작품들 속에 『모나리자Mona Lisa』1503 같은 보통 사람들의 초상화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를 거쳐 입체파에 이르면 종교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종교화는 드물지 않습니다.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에서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 그린 『림보에 간 그리스도Christ in Limbo』1867 같은 종교화를 몇 점 발견했을 때 ‘와, 세잔이 종교화를 다 그렸다고?’라며 놀라워했으니까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도 『황색의 그리스도Le Christ jaune』1889를 비롯해서 종교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폴 고갱, 『황색의 예수』, 1889년. 캔버스에 유화, 91.1 × 73.4 cm.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뉴욕.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auguin_Il_Cristo_giallo.jpg#/media/File:Gauguin_Il_Cristo_giallo.jpg 제공. |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에서는 『아담과 이브』, 『수태고지』, 『성聖 가족』, 『성 모자聖母子』, 『성모 승천』, 『동방박사의 경배』, 『아기 예수 강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다윗과 골리앗』, 『그리스도의 매장』, 『성녀 막달라 마리아』, 『유디트』, 『최후의 만찬』, 『가나의 혼인 잔치』 등등 기독교와 관련된 같은 제목의 작품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같은 제목의 작품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이 작품들을 시대별, 사조별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유디트Judith』라는 제목의 작품들을 한 번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위키미디아 커먼즈wikimedia commons」에 올라와 있는 『유디트』를 세보니 거의 200점 정도가 되더군요. 이 중 르네상스 시대의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바로크 시대의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유디트』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유디트의 귀환』, 1472년. 패널에 유화, 31 × 24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1620~1621년. 캔버스에 유화, 199 × 162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901년. 캔버스에 유화, 84 × 42 cm. 벨베데레 미술관, 빈 |
시대별로 느낌이 다 다르죠? 보티첼리의 유디트가 정적이고 우아하다면,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동적이고 극적입니다.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 모두 명암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카라바조의 유디트보다 훨씬 더 강해 보입니다. 클림트의 유디트는 앞의 다른 유디트들과는 완전히 다르죠? 클림트의 유디트는 관능성이 훨씬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성서 속의 일화나 성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작품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성인들의 이름도 알게 되고, 성서 내용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더군요. 미술관에 다니다 보면 결박당한 상태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식스팩을 뽐내고 있는 잘생긴 청년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성 세바스챤Saint Sebastian, 255~288입니다. 혹시 미술관에서 벌거벗은 몸에 화살이 꽂혀 있는 청년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보게 되면 이 이름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 성인은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형장으로 끌려가는 기독교도들을 응원하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나무 기둥에 묶인 채 화살 세례를 받았는데도 살아남은 후 황제를 찾아가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돌에 맞아 죽었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 『성 세바스챤』, 1480년대. 캔버스에 템페라와 유화, 255 × 140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목욕하고 있는 젊은 여성을 늙은 남자 두 명이 훔쳐보고 있는 그림도 미술관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에는 『수잔나와 장로들Susanna and the Elders』 혹은 『목욕하는 수잔나Susanna at the Bath』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두 장로가 요아킴Joachim의 아내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목욕하는 수잔나에게 몰래 접근하죠. 그런데 수잔나가 유혹을 거절하자 이 두 장로가 그녀를 간음죄로 고발한답니다. 다행히 현명한 재판관 다니엘Daniel이 수잔나의 누명을 벗겨줍니다. 여성의 벗은 몸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그릴 수 있는 좋은 소재다 보니 수많은 화가들이 이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답니다. 런던의 국립미술관에는 루도비코 카라치Ludovico Carracci, 1555~1619와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의 작품이 위아래로 걸려 있습니다.
위 그림 – 루도비코 카라치, 『수잔나와 장로들』, 1616년. 146.6 × 116.5 cm, 캔버스에 유화. 국립미술관, 런던. / 아래 그림 – 귀도 레니, 『수잔나와 장로들』, 1620~1625년. 116.6 × 150.5 cm, 캔버스에 유화. 국립미술관, 런던. |
자주 보는 그림들 덕분에 성인들이나 성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경 구절도 배우게 됩니다. 땅바닥에 엎드리듯 앉아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여성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에는 어김없이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구절로 부활한 예수가 무덤 밖에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이라고 합니다. 문자를 모르는 신도들에게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기독교 성화의 핵심적인 역할이 제게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죠?
안드레아 델 사르토, 『나를 만지지 말라』, 1510. 패널에 유화, 176 × 155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같은 제목을 가진 기독교 성화들을 많이 볼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제목을 가진 불화佛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그린 『여래도如來圖』,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같은 보살을 그린 다양한 『보살도』들,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을 그린 『나한도阿羅漢』들, 명부에서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을 그린 『시왕도十王圖』들 등이 대표적이죠. 서양의 미술관에서 『엠마오의 만찬』 덕에 같은 제목을 단 여러 그림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면, 우리나라 미술관에서는 달이 비친 바다 가운데 금강보석金剛寶石에 앉아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그런 역할을 해줬습니다. 『수월관음도』가 딱 한 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시회에서 『수월관음도』를 본 적도 있고, 외국에도 『수월관음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공식적으로 여섯 점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월관음도』는 그 수가 매우 많답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찍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월관음도』입니다. 사진이 썩 좋진 않죠? 그림의 보존 상태가 나빠서 채색이 흐릿한 데다, 그림 앞에 유리막이 있어서 사진 찍는 제 모습과 다른 관람객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사돼서 보입니다. 일본에 있던 이 작품을 사업가인 윤동한이 구매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기증 당시 사진에는 족자 색이 파란색이었는데 전시회에서는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리움미술관에 있던 『수월관음도』는 얼마 전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에 포함됐다고 합니다.
왼쪽 사진 - 『수월관음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색, 172 × 63 cm.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 오른쪽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제공. |
『수월관음도』처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도 이 세상에 딱 한 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과 중국과 일본, 인도의 『반가사유상』을 비교한 설명문이 있는 걸 보면 반가사유상이 불교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각상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사유의 방’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에는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돼 있습니다.
『반가사유상』 두 점이 전시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
기독교 성화와 불화 외에도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에서는 아프로디테, 큐피드, 아폴론, 제우스, 레다, 다나에,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같은 그리스 신화 속 신들과 인물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꽃과 새와 동물을 그린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 책과 여러 사물들을 그린 『책가도冊架圖』, 용과 구름을 그린 운룡도雲龍圖,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작호도鵲虎圖 등을 수없이 만날 수 있고요. 인도의 세밀화miniature 중에는 힌두교 신인 크리슈나Krishna와 그의 연인 라다Radha를 그린 『크리슈나와 라다』들이 수두룩합니다. 나라마다, 종교마다 제가 모르는,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들은 별처럼 많이 있을 겁니다. 미술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이런 작품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겠죠?
마나쿠, 『시인의 경배를 받고 있는 라다와 크리슈나』, 1730년. 20 × 30 cm, 종이에 채색. 국립미술관, 뉴델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ayadeva_bow_to_Radha-krishna.jpg#/media/File:Jayadeva_bow_to_Radha-krishna.jpg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