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찍은 보스턴미술관 사진입니다. 이오니아식 기둥들 위로 미술관 이름, ‘뮤지엄 어브 파인 아츠Museum of Fine Arts’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글씨가 선명하지 않아서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모스크바의 푸슈킨미술관러시아어로 Музей изобразительных искусств имени А. С. Пушкина, 영어로 The Pushkin State Museum of Fine Arts의 이름에도 ‘파인 아츠fine arts’가 들어 있습니다. 그냥 ‘뮤지엄 어브 아트museum of art’라고 해도 미술관이 될 텐데 왜 굳이 ‘뮤지엄 어브 파인 아츠’라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그런데 ‘파인 아츠’라는 표현을 들어보셨나요?
제가 ‘파인 아츠’라는 표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뮤지엄 어브 아트’라는 표현은 많이 접해봤기 때문에 익숙한 편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같은 미술관의 이름에서 쉽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뮤지엄 어브 파인 아츠’라는 명칭은 생소했습니다. “‘파인 아츠’가 뭐지? 그런데 왜 둘 다 똑같이 ‘미술관’으로 불리는 걸까? ‘뮤지엄 어브 아트’와 ‘뮤지엄 어브 파인 아츠’가 같다는 말인가? 그럼 ‘아트’와 ‘파인 아츠’도 같은 말인가?”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파인 아츠’가 들어 있는 다른 표현들이 있더군요. ‘아트 스쿨art school’ 대신 ‘스쿨 어브 파인 아츠school of fine arts’가, ‘아트 딜러art dealer’ 대신 ‘파인 아트 딜러fine art dealer’가 사용되기도 하니까요. ‘파인fine’이라는 단어가 더 들어 있음에도 우리말에서는 구분 없이 모두 ‘미술 학교’와 ‘미술상 혹은 화상畫商’으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트’와 ‘파인 아츠’를 동의어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두 표현 모두 우리말로 ‘미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아트’라고 하면 될 텐데 굳이 ‘파인 아츠’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그 이유를 따져보지는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기 초에 강의실로 올라가는 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학생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번 학기에 어떤 과목을 신청했어?”
“순수 미술 과목을 두 개 신청했어.”
‘순수 미술이라니! 순수하지 않은 미술도 있나? 문학이나 음악 앞에 ‘순수’라는 말을 붙이는 경우가 있던가?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을 저 두 학생은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일상 대화에 쓰고 있지?’ 미술 비전공자인 제게는 낯설기만 한 ‘순수 미술’이라는 용어가 예술디자인학부 소속인 것 같은 두 학생에게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용어 같았습니다. 이 두 학생의 대화 덕분에 제 머릿속에서 꼬마전구 하나가 반짝하고 켜졌습니다. “아, ‘파인 아츠’를 ‘순수 미술’이라고 하나보다!” 저는 ‘순수 미술’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파인 아츠’와 ‘순수 미술’을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둘을 연결해 놓고 보니 ‘파인 아츠’가 왜 ‘순수 미술’인지 이해가 됐습니다. ‘파인fine’에는 ‘좋다’ 혹은 ‘훌륭하다’는 뜻도 있지만 ‘순은fine silver’처럼 ‘정제되다’ 혹은 ‘순수하다’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파인’에 들어있는 이 ‘순수하다’는 의미 때문에 ‘파인 아츠’가 ‘순수 미술’이 된 것 같습니다. ‘파인 아츠’는 생소해도 ‘보자르beaux arts’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파인 아츠’의 프랑스어 표현이 ‘보자르’더군요.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이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피아노 삼중주단인 ‘보자르 트리오Beaux-Arts Trio’를 아실 겁니다. ― 이 경우에는 ‘순수 미술’이 아니라 ‘순수 예술’을 의미할 확률이 높습니다. ― ‘보자르’ 덕분에 ‘파인 아츠’라는 용어가 갑자기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다시 위의 궁금증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술이 ‘순수’하다면 무엇이 순수하다는 말일까요? ‘순수하지 못한’ 미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미술을 가리키는 걸까요? 순수 미술의 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 먼저 ‘미술’과 ‘순수 미술’의 사전적인 정의부터 찾아봤습니다. ‘미술’은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네이버 사전로, ‘순수 미술’은 “무엇보다도 미학 또는 아름다움을 위해서 발전된 미술”위키피디아이자, “순수한 미적 표현이 강조되는 미술”네이버 사전이며, “예술적 가치를 독점적으로 하는 활동과 작품을 가리키는 개념”위키백과으로 정의돼 있더군요. 요약하면, ‘순수 미술’은 미를 표현한다는 목표를 전적으로, “순수하게” 추구하는 미술인 거죠.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목적만을 추구하는 ‘순수 미술’과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일까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감수하고 크게 분류하자면, 순수 미술의 반대는 미적 목적 이외에 “실용적인 기능”이라는 다른 ‘순수하지 못한’ 목적이 섞여 있는 미술을 가리킵니다. 이런 실제적인 유용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미술은 ‘응용 미술’ 혹은 ‘장식 미술’로 불리더군요. 순수 미술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분야는 회화와 조소 같은 시각 미술이고, 응용 미술이나 장식 미술 분야에는 도예와 금속 공예가 포함됩니다. 미술이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 두 범주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대학의 학과 구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미술대학의 미술학부는 한국화 전공, 회화 전공, 조소 전공으로 나뉘어져 있고, 도예학과는 예술 디자인 대학에 소속돼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화와 사진, 비디오 제작과 편집, 디자인, 개념 미술 같은 현대적인 형태의 미술도 순수 미술의 범주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하네요. 미술가가 어떤 형태의 미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드러내건, 그 방법과 상관없이 미술가의 생각이나 의도가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니까요. 제 생각에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 변기를 이용해 만든 「샘」1917인 것 같습니다. 변기는 원래 실용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생활용품이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미학적인 대상으로 바뀔 수 있으니까요.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는 야수파 화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1880~1954과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화가로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도자기 작품도 많이 제작했습니다. 파리의 근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에 갔더니 드랭이 만든 도자기 작품들이 전시돼 있더군요. 피카소는 2,000점 이상의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랭과 피카소가 만든 도자기 작품들은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미적인 아이디어를 표출한 순수 미술 작품입니다.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역시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의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 같습니다. 미술관 이름에 ‘순수 미술fine arts’이 들어 있기 때문에 혹시 미술관에 회화와 조소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닌가 추측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스턴미술관에는 기원전 19세기의 오리 모양 문진들이나 이집트 미라의 얼굴 덮개,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부터 20세기의 데덤Dedham 자기나 조명등 같은 장식 미술품 등 수많은 응용 미술 작품들이 있습니다.
앙드레 드랭, 「꽃병」, 1906. 세라믹, 근대미술관, 파리. |
다드 헌터 디자인, 칼 클립 제작, 「거는 조명등」, 1903~1908. 구리, 도금 은, 스테인드글라스, 가죽. 보스턴미술관, 보스턴. |
순수 미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좁은 의미의 정의는 순수 미술을 회화와 조소 같은 시각예술로 한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에서조차 순수 미술은 두 분야로 나뉘기 때문에 복수인 ‘파인 아츠fine arts’로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회화와 조소 중 한 분야만 가리킬 때는 단수인 ‘파인 아트fine art’가 맞습니다. 그러나 회화와 조소를 모두 나타낼 때는 보스턴미술관의 이름에서처럼 복수인 ‘파인 아츠fine arts’로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파인 아츠’는 ‘순수 미술’을 의미하지만 때에 따라 ‘순수 예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순수 예술 역시 순수 미술과 마찬가지로 유용성이 아니라 미적 혹은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다음 중 ‘순수 예술’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1. 회화
2. 조소
3. 건축
4. 음악
5. 시
6. 연극
7. 무용
8. 자수
쉽게 답을 찾으셨을 겁니다. 답은 8번 자수입니다. 회화와 조소는 순수 미술에 포함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1번과 2번은 제외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음악과 시를 선택하신 분도 없겠죠? 연극과 무용이 순수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실 분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건축입니다. 건축은 심미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거주나 다른 실제적인 용도니까요. 그런데도 건축은 역사적으로 순수 예술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8번 자수는 순수 미술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여성 미술사학자인 아만다 비커리Amanda Vickery는 BBC 다큐멘터리, 「여성과 예술 이야기The Story of Women and Art」2014에서 자수가 순수 미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성불평등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공방에서 도제식 교육을 통해 미술 교육이 이루어지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여성들은 회화와 조각 같은 순수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습니다. 회화와 조각은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 순수 미술로 대접을 받은 반면, 여성들이 만들어낸 자수나 태피스트리, 장식품 등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수공예품으로 간주된 거죠.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의 구분에는 남녀 불평등 문제뿐만 아니라 순수 미술을 응용 미술보다 우위로 간주하는 문제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개인의 천재성을 강조하며 ‘예술가artist’ 개념을 만들어낸 이후, 개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드러나지 않는 창조 작업은 중요하지 않은, 장식 공예로 폄하되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아닌 장인artisan 혹은 공예가craftsman로 취급됐습니다. 그러나 순수 예술/응용 미술 내지는 예술가/공예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순수 예술과 예술가를 우위에 두는 바사리 식 구분 방법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작업의 특성상 개인적인 혁신성을 강조하지 않은 채 수 천 년 동안 집단적인 공예 전통을 이어오며 도자기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예술가로 불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역시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에서 순수 예술과 유용한 예술응용 미술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순수 예술과 유용한 예술, 즉 예술과 기술을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으며, 어떤 점에서 보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양자 사이의 구분은 예술작품 자체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 자체와는 관계없는 외적 관련 속에서 나온 것이다…… 순수하고 심미적인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인은 작품을 만들고, 작품을 지각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 속에 삶의 충만감과 완성감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이죠.
최근에는 순수 미술/응용 미술, 혹은 예술가/공예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시각예술’이라는 용어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순수 미술이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근거에서 폐기 처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순수 미술’은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술 대학에는 아직도 ‘순수 미술학과’가 존재하고, ‘순수 미술 석사 학위’도 있으며, “순수 미술 작가 양성” 같은 교과 과정 목표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순수 미술 개념을 케케묵은 진부한 개념으로 치부하기 전에 먼저 ‘순수 미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