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에서 ‘파멸의 그림자’를 본 적이 있는가?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The Hour of the Star』이룸, 2007는 브라질 여성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의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이다. 이 소설은 파멸이 예견된 한 여자에 관한 애가哀歌다. 혹은 예견된 파멸을 어떻게 전달할까 고뇌하는 이야기다. 사회 안에서 승승장구하다 몰락하는 자에게 적합한 단어가 파멸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에게 파멸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는 지지리 박복한 고아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생존능력도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허약한 몸뚱이 하나다. ‘난 누구지?’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지?’ 그런 자의식과 불만도 없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파멸이 아니라 도태에 ‘최적화’된 여자다. 여자는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사막의 바람에 실려 온 모래 알갱이처럼, 익명의 바다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그런 의미에서 파멸할 것이 없는 여자다. 자연 상태의 풀꽃이 피었다 진다고 하여 파멸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여자는 브라질에서도 가장 범죄율이 높고 가뭄과 극빈에 시달리는 북동부 오지 알라고아스 출신이다. 여자의 상황은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런 마당임에도 여자는 ‘백치의 천진한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 여자는 외계행성만큼 낯선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 어느 날 느닷없이 착지한다. 맞춤법조차 모르는 여자가 그곳에서 타이피스트로 살아간다면? 풀씨 같은 여자가 대도시의 시멘트 바닥 위에서 과연 뿌리내릴 수 있을까?
여성 화자가 여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같은 여자로서 여자가 가여워서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까? 작가는 여성 화자에게 차마 맡길 수 없어 남성 화자에게 여자를 맡긴다. 남성 화자의 이름은 호드리고 S.M.이다. 남성 화자가 설계한 이야기에서 여자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희생적이다. 여자는 불행은 견디고 고통은 참는다. 호드리고 'SM'이라는 이름처럼 화자는 여자에게 가혹하다. 하찮은 여자의 삶이란 이렇지 않을까라고 설득하듯, 화자는 여자의 상황을 최악으로 묘사한다. 화자는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로 보인다. 광고가 유혹하는 대로 마를린 먼로를 동경하고 코카콜라나 마시는 여자에게 화자가 뭔들 못하겠는가.
여자에게도 사랑이라는 것이 찾아올까, 사랑의 감정이 있기나 한지 화자는 궁금해진다. ‘미개한’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는지 호기심을 갖는 철학자처럼 말이다. 열아홉 살의 어느 날 여자는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한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남자의 직업은 금속공장 노동자 수준일 것이다. 올링피쿠가 여자이름을 묻는다. 화자는 소설이 절반이나 진행되었지만 여자에게 이름마저 부여해주지 않았다는 점에 놀란다. 즉석에서 여자이름이 탄생한다. 여자가 대답한다. “마카베아예요.” 남자는 “무슨 ‘피부병 이름’ 같네요.” 라고 말한다. 여자는 존재 자체가 질병이다.
여자와 어슷비슷한 조건의 남자라면 어떨까? 남자도 여자처럼 가뭄, 빈곤, 범죄로 넘쳐나는 북동부 출신이다. 여자가 파멸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면, 남자는 생존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올링피쿠는 살인, 강도와 같은 범죄행위에서 남자의 권위와 명예를 느끼고, 잘난 척하는 데서 남자의 우월감을 맛본다. 뻔뻔하고 흉측하고 어이없고 코믹하지만 남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고 살아남겠다는 야심과 야망만큼은 가지고 있다. 자기 유전자 배달에 바쁜 남자에게 여자의 자궁은 궁핍하기 짝이 없다. 남자는 성적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를 망설임 없이 버린다. 남자는 여자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글래머인 글로리아에게로 한 단계 도약한다. 상투적인 화자는 여자가 그런 식으로 버림받으리라고 이미 예견했다. 사냥꾼 남자에게 포획된 희생물인 여자가 어떻게 탈주할 수 있으랴.
자신의 피조물을 이렇게 남루하게 만들어도 될까? 화자의 태도는 읽는 독자마저 짜증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기괴하게도 식물처럼 물만 마시고 숨만 쉬는 무해한 여자로 인해 화자의 자신감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화자는 거울에 비친 황량한 자기 모습에서 북동부 여자의 지친 얼굴과 마주한다. 여자의 미래를 설계하자고 했던 호드리고 S.M.의 확신이 무너지면서, 화자는 무력한 여자 마카베아와 어느새 겹쳐지고 자리바꿈을 한다. 화자가 그녀를 창조하려면 그녀의 단순 무지하고 소박한 언어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적이고 철학적인 화자의 언어와 단순한 여자의 말소리가 서로 충돌하면서 화자의 서사는 비틀거린다. 화자의 논리적 사고는 백치 같은 여자의 이해하기 힘든 목소리로 인해 틈새가 벌어진다. 아무리 하찮게 그려도 하찮아지지 않는 여자로 인해 화자의 이야기는 중구난방이 되어버린다.
여자의 말들이 화자의 언어를 접수한다. 미미하지만 보석 같고, 하찮지만 존엄한 마카베아란 수수께끼를 남성 화자의 이성적 언어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백지 상태인 여자의 삶쯤이야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지만, 화자는 자기 기획에 스스로 말려든다. 마카베아로 인해 화자는 자기 서사를 뒤돌아보게 된다. 화자는 이 가여운 여자에게 ‘과장된 언어로 광채를 입혀서 현란하게’ 만드는 식의 글이 옳은지 회의에 빠져든다. 화자가 회의에 빠져들면서 마카베아는 화자를 삼키고, 그의 목소리를 빈번히 대체해버린다.
소설은 메타서사적 고민으로 우회하고 헤매다가 마침내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마카베아는 젊은 시절 한때 창녀, 포주를 거쳐 지금은 홍등가에서 점쟁이 노릇을 하고 있는 마담 카르로타를 찾아간다. 마담은 여자에게 멋진 외국인 남자를 만날 운명이라고 말해주면서 복채를 챙긴다. 여자는 미래로 가득 찬, ‘새’ 사람이 된 기분으로 점집을 나온다. 그 순간 마담의 예언은 실현된다. 여자는 외국인이 모는 노란색 벤츠 승용차와 충돌한다. 여자의 몸은 공중으로 가볍게 날아오른다. 여자의 삶은 죽음으로 도약한다. 죽음을 통해 마침내 마카베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화자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제 죽음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화자는 여자의 남루한 삶을 죽음으로 구원하고자 한다. 마카베아의 죽음이 곧 그의 죽음이므로. 여자에게 죽음의 순간은 자신과 만나는 순간이 된다. 죽음의 순간 처음으로 여자는 자신을 의식한다. 자의식이 곧 생이며 그 반대가 죽음을 뜻한다면, 죽음의 순간 여자의 삶은 시작된다. 마카베아에게 죽음은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자 탄생의 순간이다. 물방울이 모여 구름이 되듯 여자에게 죽음은 무거운 육체가 ‘기운찬 공기’로 변화하는 기적의 순간이다. 여자는 ‘오늘이 내 인생의 새벽이야. 난 다시 태어났어.’라고 느낀다. 여자는 ‘물질이 아닌 빛으로 된 뭔가를 토할 것 같았다. 그 빛은 수천 갈래로 뻗어 나가는 별이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마카베아의 짧고 남루한 삶은 별이 되고 그녀의 파멸은 구원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너무 안이한 결론이지 않을까? 여자의 삶이 그처럼 별 볼일 없다고 구구절절 이야기하다가 죽은 다음에는 간단히 별로 처리해버리다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화자가 자기가 창조한 인물을 그처럼 허무하게 살해해도 되는가. 게다가 구원마저 화자가 베푸는 마지막 시혜라고 한다면? 마카베아는 찬란한 찰나의 순간 자신의 전全 존재와 정말 대면했을까? 마카베아는 ‘나는, 나는, 나는……’이라고 뱃속에서 차오르는 것들을 토해내려고 한다. 하지만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한다. ‘나, 마카베아,’ ‘너는 누구인가’는 말줄임표의 침묵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드디어 본질이 본질에 닿았다. 승리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별이 되는 그 찰나의 순간 마카베아는 화자/작가와 겹친다. 마카베아가 화자를 죽임으로써, 화자인 ‘나’는 마카베아의 죽음과 합체된다. 화자는 ‘마카베아는 나를 죽였다’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죽음으로 ‘본질과 본질이 맞닿는다. 승리다’라는 것이 작가의 말이라고 한다면? 마침내 마카베아가 화자/작가를 구원한 것이 승리라는 뜻일까?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죽은 마카베아와 달리 살아 있는 화자/작가는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지금이 딸기철인 것을 기억한다.
사족이지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브라질 모더니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여성작가로 평가받는다. 리스펙토르는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 그중에서도 프랑스 ‘포스트’ 이론가들이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암으로 운명을 달리하기 직전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북동부 지역을 추억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브라질 오지로 건너온 가난한 유대계 이민 가정 출신인 리스펙토르는 죽기 직전 어린 시절에 살았던 북동부 지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아무렴 그곳의 딸기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