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1Q84』가 그리는 1984년의 일본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는 『1Q84』와 조지 오웰의 『1984』의 관계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1Q84』와 『1984』는 그 작품명의 유사성은 말할 것도 없이 최대의 수수께끼인 리틀 피플의 존재가 『1984』의 빅브라더와 대비되는 형태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련을 가진다. 동시에 이는 양자를 구별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하루키가 그리는 1984년의 도쿄에는 조지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처럼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국가나 정치권력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국가권력은 사적 공간과 명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를 대표하는 소설적 표식이 개인의 현관문을 두드리기만 하는 NHK 수납원의 존재이다. 전후일본국은 국가의 정치적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NHK의 수신료 징수 시 국가에 의한 강제집행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경우 TV를 거부한다면 수신료를 내지 않을 권리가 부여된 것이고 하다. 이러한 설정은 1984년의 도쿄는 빅브라더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를 함부로 허무는 『1984』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가 『1Q84』를 통해 1984년의 일본이 당시의 세계인들과 일본인들이 생각했듯이 ‘유토피아’적 요소가 많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루키의 문제의식은 빅브라더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1Q84』 속에서 발발하는 폭력은 빅브라더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부부의 침실과 가족의 휴일, 종교단체의 사유지에서 벌어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아오마메와 덴고는 바로 이러한 곳에 고이고 썩어가는 폭력에 노출되어 어린 시절의 중요한 시절을 보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서로에 강하게 끌려, 마침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폭력에 대해 저항하는 길을 걷게 된다.
물론 하루키가 가시화하는 이러한 폭력은, 전쟁과 아우슈비츠, 테러, 난민학살 등과 관련해서 최근 인문학에서 주로 다루는 폭력에 비한다면 매우 하찮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키가 다루는 폭력은 그야말로 ‘주관적 폭력’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폭력에 대한 개인의 응수는 대중영화 속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고, 이러한 정념과 행동의 정당화는 결국 국가의 감시체계와 공권력의 강화라는 정책 반영을 뒷받침하는 데 전용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사적공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폭력을 근거로 어떤 세계의 불완전성을 전경화하는 것은, 종종 권력 측의 사적 공간의 개입의 정당화로 전용될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고, 이것이야말로 빅브라더의 출현을 앞당기는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빅브라더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를 일종의 절대적 폭력공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 역시 지젝이 지적한 바 있듯이 마치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여기’를 마치 낙원인 양 무한 긍정하게 만들고 만다는 측면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예컨대 이는 북한 체제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종종 남한 체제의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만들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984년의 일본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가시화하며 그 자체로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다뤄가는 『1Q84』는 반드시 통속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이 소설은 유토피아적인 기획이 어떻게 폭력적인 형태로 전회하면서 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변모시키는가를 1960년대 전공투 학생 운동의 후일담에 근거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폭력적인 학생운동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종교단체로 거듭난 ‘선구’의 이미지가, 1995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옴진리교를 모델로 한 것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적된 바 있다. 피를 흘리는 폭력을 지양하고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적 활동이, 폭력적인 메시아의 등장으로 이어진다는 역설. 이는 비단 옴진리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치에 의한 아우슈비츠를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Q84』는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에세이 「폭력비판론」으로부터 촉발된 폭력 담론들 속에서 읽을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폭력을 법제정적/유지적 폭력과 법파괴적 폭력으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으로, 피를 흘리는 폭력과 피를 흘리지 않는 폭력으로 나눈 바 있다. 이러한 벤야민적인 폭력 분류에 따르자면 『1Q84』는 법의 보호 속에서 평화적으로 성장해간 종교단체의 폭력성신화적 폭력과 법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목적하는 타깃을 정확하게 저쪽 세상으로 보내는 아오마메라는 킬러의 폭력성신적 폭력을 각각 대비시키며, 과연 어떤 것이 더욱 폭력적인 것인가를 묻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는 법으로서의 국가와 이기적인 유전자의 소유자인 개인, 유토피아적 사고와 디스토피아적 현실 인식 중 어떤 것이 더욱 폭력적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궁극적으로는 과연 ‘폭력’을 통해서 이 양자를 구별해도 괜찮은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1Q84』를 통해 보이는 폭력에 대한 하루키의 입장이, 피를 흘리는 폭력의 대안으로서의 신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벤야민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분노에서 촉발된 아오마메의 폭력적 행위를 신적 폭력으로 보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리틀 피플의 폭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후카에리라는 매력적인 소녀의 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리틀 피플은, 죽은 산양의 입을 통해서 하나둘씩 나와서 그녀의 복제를 만들고, 그 복제물을 통해서 자신의 말을 이 세계에 전달하고자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초월적인 힘을 가진 폭력적인 종교 지도자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이다. 하지만 하루키 스스로가 말했고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텍스트 속의 리틀 피플의 존재는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이 세계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카에리의 아버지인 ‘선구’의 리더의 말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빅브라더가 매우 체계적으로 폭력을 관리하고 독점함으로써 ‘폭력적’인 존재가 되었다면, 리틀 피플은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기보다는 폭력을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전달하고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전자의 목적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을 완전히 소거시킴으로써 스스로의 권력 유지라는 데 있다면, 후자는 폭력의 독점보다는 선과 악, 빛과 그림자라는 이원론적인 세계의 “균형 유지”를 위해 그것을 배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 정도이다.
요컨대 『1984』 속의 빅브라더적인 폭력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평화와 폭력, 허구와 사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라는 이 이원론적 경계를 붕괴시키고 일원화하는 과정 속에서 유발된다면, 『1Q84』 속의 리틀 피플적인 폭력은 일원론적인 세계를 이원론적 세계로 분열시키는 과정에서 가행된다. 『1984』에서 각기 다른 인간들이 빅브라더의 감시와 통제, 조직 하에 개별성을 상실한 거죽만 남은 인간으로 통합되어간다면, 리틀 피플이 있는 『1Q84』에서는 하나의 달이 두 개의 달로, 하나의 신체를 가진 인간이 마더와 도터로 분열되고, 국가폭력 대신에 종교 단체의 폭력과 개인의 폭력이 충돌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양쪽 세계 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법의 정신』에서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순수성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세계의 외부”를 상정하는 유토피아적 행위 속에 감춰진 폭력성을 경고한 자크 데리다처럼, 『1Q84』 역시 폭력 없는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 속의 하루키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빅브라더가 없는 공간을 실현한다면 폭력 없는 세계가 도래할 수 있다는 식의 믿음, 다시 말해 허구가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현실세계 속에서 유토피아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데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와 관련해 더 이상 어떤 가능성이 우리들에게 남아 있을까. 그리고 『IQ84』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시사점을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은 어떻게 이 세계에서 폭력을 추방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어떻게든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이 잔혹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폭력을 멈출 수 있는가로, 한발 물러나고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는 체호프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세계 속에는 이미 총이 주어져 있으며, 그것은 폭력 행사가 이미 우리 내부 안에 하나의 잠재적 선택으로 주어져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루키는 일단 이러한 체호프의 말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이를 거슬러 내 손에 쥐어진 권총을 어떻게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1Q84』에서 하루키는 폭력 중지의 가능성을 오직 ‘사랑’에서 찾는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폭력의 화신이 된 아오마메가 이 폭력의 연쇄를 끊는 길은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오직 덴고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를 깨달은 아오마메가 덴고와 해후하기까지의 긴 종반은,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로맨스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유토피아적 기획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낳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절망이 더 강력한 유토피아를 부르는,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의 탈출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랑을 유토피아적 사고의 외부에 두고 싶어 하는 하루키의 관점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랑을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하는 여러 시도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식시키기 어렵다. 예컨대 사랑을 통한 공동체의 결속이야말로 서구 기독교가 오랫동안 주장해왔었던 것은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그것은 국가에서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확장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통한, 사랑에 의한 존재의 확인은 매우 근대적인 유토피아의 방식을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사실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몇 되지 않는 카드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사랑예찬』이라는 에세이에서 알랭 바디우는 늘 정체성의 문제를 부각시켜가며 차이를 말살하는 ‘세계화한 자본주의’ 앞에서는 사랑도 위협받게 됨을 지적하면서, “법을 위반하고 법에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사랑을 보호”할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이는 평화와 안전을 미끼로 나와 다른 존재를 경계선 밖으로 추방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오늘날의 풍조 속에서 사랑의 소임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상기시킨 말인데, 이는 『1Q84』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즉, 이미 법을 위반하고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힌 아오마메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덴고의 사랑 이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결국 『1Q84』를 통해 하루키는 폭력의 외부를 지향하는 어떠한 유토피아도 거부하고, 오히려 잠재적 폭력성을 사랑을 통해 잠재우기를 제안한다. 그러한 사랑 안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이다. 이는 마치 비틀스나 존 레넌의 노래가사처럼 우리를 훈훈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 실효성에 봤을 때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루키 문학의 한계로 지적받고 있는 대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루키의 세계관은 지난 세기 유토피아적 기획이 낳은 비극의 후유증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위안을 제공해주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