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스의 동태적 유토피아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기존의 유토피아 담론을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작하는 웰스의 작업은 ‘개인과 국가’ 간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선 그는 절대적 개인주의와 절대적 사회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국민을 “국가 공무원의 노예”(64쪽)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개인주의는 국민을 “광폭한 자들이나 부유한 자들”의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배척 대상이 되었다. 웰스는 “개인 대 국가 간 관계에서 국가는 절대적으로 종Species을 대표한다”(65쪽)고 했다. 여기서 ‘종’은 생물 종을 의미하며, 웰스가 생물학적 ‘종’의 개념을 그의 유토피아론에 이식시킨 이유는 다윈의 ‘종’ 개념이야말로 국가와 개인 간 상보적 관계를 설명하는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개인 간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국가를 하나의 발달단계에서 다음 발달단계로 계속해서 이끄는 요소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개인들 간 상호작용이다. 목적론적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개인들의] 창조적 진취성을 위해 그리고 창조적 진취성을 통해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성은 창조적 진취성을 이루는 방법이다. 남자와 여자는 각기 각자의 개인성이 특성화되는 정도에 따라 판례가 되는 법을 따르지 않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공식을 따르지 않기도 하고, 생명력이 이끄는 대로 새로운 실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평균[일반]을 대표하는 그리고 평균[일반]만 따지는 국가가 효과적인 실험을 하고 지적인 혁신을 이룩하며 생명의 가장 중요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개체는 종에서 나와 자신의 실험을 진행하고 실패하여, 죽고, 끝나버리거나 혹은 성공해서 지적 결과물과 물질적, 그리고 도덕적 결과물로 후손을 통해 자신을 세계에 각인시킨다. (64~65쪽)
웰스가 그의 유토피아론을 전개하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가져온 것은 일차적으로는 1870년대 이후 영국사회에 불어 닥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윈의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의 개념을 사회학이나 경제학 또는 정치학에 응용한 사회진화론은 개인 간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설계의 초석이 되었고 우생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웰스는 그의 유토피아론에서 이러한 기존의 사회진화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태학적 접근을 펼치고 있다.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 치중했던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과는 달리 생태학적 세계관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개체생물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세포가 모여 조직을 형성하고 조직에서 기관이, 그리고 기관이 모여 생물 개체를 형성하는, 이를테면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상호관계가 1930년대 이후 개체생물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개체생물학이 생태학적 관점에 제공한 단서는 ‘전일적’holistic 사유이다. 이러한 전체적 시각은 “생물개체군과 그 생물개체군이 처한 물리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생태계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켜왔다. 이러한 생태학적 시각은 특히 1960년대 이후 가속화된 시스템적 시각의 부상에 크게 기여했다. 카프라에 의하면, 시스템적 시각은 네트워크적 시각으로서 “비록 어느 시스템에서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한 부분을 구별해 낼 수는 있지만, 그 부분은 전체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전체의 특성은 단순히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29쪽). 어떤 생물 개체를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상호작용으로 파악하는 전일주의적 시각은 개방형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다. 모든 생물 개체는 개방형 시스템open system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개체를 스스로 변화시켜나가고 개체의 변화에 따라 환경이 변화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는 부분이 변하면 전체가 변하고 전체가 변하면 부분도 변하는 역동성이 발생한다. 즉 시스템과 시스템 사이에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으로 하나의 시스템의 변화가 다른 시스템에 피드백을 주고 그 시스템이 변하면 이 변화치가 피드백을 준 원래의 시스템에 다시 변화를 준다. 이 변화와 역동성이야말로 시스템적 사고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웰스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에서 제시한 공산사회나 모어의 『유토피아』와 같은 정태적 폐쇄형 시스템이 아닌 동태적 개방형 시스템이다. 웰스의 유토피아에서는 철저히 개인이 중심이다. 그가 구상한 이상사회에서 국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법령은 자유를 위해 존재하며 세계는 “실험과 경험 그리고 변화”(66쪽)를 위해 존재한다. 웰스는 ‘실험’이라는 말로 개인성의 용출湧出을 표현하고 있다. 개인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이러한 ‘실험’을 통해 국가는 변화의 동력을 확보한다. 개인과 국가,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개인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발의하는 과정을 통해 국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안정은 국가를 표상하는 말이 될 수 없으며 국가는 개인과의 피드백을 통해 항상 변화에 노정되어 있다. 『모던 유토피아』의 개방형 시스템하에서는 ‘완전한 이상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마찰’과 ‘갈등’이 상존하는 곳이며 좀 더 나은 경제체제, 정치체제를 창조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는 곳이다. 웰스의 신국가론에서 세습적 의미의 계급 혹은 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개개인이 갖고 있는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는 개인적 기질에 따라 네 가지 인간형으로 분류될 뿐이다. ‘창조적 인간형’ ‘역동적 인간형’ ‘우매한 인간형’ 그리고 ‘저열한 인간형’이 그것이다(179쪽). 웰스는 그가 내세운 화자의 입을 빌려 이 네 가지 인간형은 이론적으로 기획된 것이며 실제 생활에서는 적용하기 불가능한 하나의 가설이라 말한다. 이에 대한 웰스의 변은 어떤 인간은 창조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또 어떤 인간은 저열하면서도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웰스의 신국가론에서 모든 국민은 국가가 정한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동등한 의무교육을 받고 창조적 인간이 될지 저열한 인간이 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 웰스의 이 네 가지 인간형 구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웰스가 ‘상상력’을 인간의 최상위 수준의 인지 활동이라 일컫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에서 시인과 같은 수사학자들의 상상력이야말로 가장 저급한 지적활동 중 하나라고 말한 것과 대조된다. 웰스는 시인의 상상력을 과학자의 상상력과 동일시함으로써 재능을 가진 개인이 세상에서 그의 상상력을 실험하는 것이야말로 미래사회의 진보를 담보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기존 유토피아 담론을 개작한 웰스의 신 유토피아는 이러한 혁신적 구상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유토피아를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기존 유토피아 담론을 계승하고 있다. 웰스는 그의 유토피아 공화국 통치자 집단을 사무라이 집단이라 지칭했다. 웰스가 일본의 무사 계급을 지칭하는 사무라이를 그의 신 유토피아 통치 집단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일본도를 찬 사무라이의 이미지는 왕정을 폐지한 공화주의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호위무사들이었던 의회기사단이나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군인계급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무라이 통치 집단은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에서 철학자들을 이상국가의 수호자(통치자)라고 설정한 것과 흡사하다. 플라톤의 수호자들과는 달리 웰스의 사무라이 집단은 보통 사람들 중에서 원하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정규교육 과정을 통해 선발되며 소정의 시험을 거쳐 자원한다. 자원자는 운문 또는 산문으로 쓰인 각종 문학적 저술이 수록된 『사무라이서』The Book of the Samurai를 읽어야 하며,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사무라이가 되고자 하는 자로서의 소양과 덕목을 갖추게 된다. 사무라이가 되고자 하는 자는 25세가 될 때까지 자기절제를 훈련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담배와 술, 마약류가 금지되고 성행위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윤을 남길 목적의 매매행위도 엄격히 금지된다.
『모던 유토피아』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111년이 된다.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에는 전통과 혁신이 공존한다. 이전 유토피아 담론들에 비해 부분적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개인이 원하는 사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신공화국을 설계한 것은 혁신이었다. 토지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개인의 고용불안을 국가가 책임지며,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양육하게 되면 국가가 여성의 양육을 임금노동으로 환산하여 급여를 지불하는 것 또한 혁신이었다. 그가 기존 유토피아 담론에서 혁신하지 않은 것은 ‘사무라이’라는 명칭의 엘리트 통치 계급이었다. 왜 그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군인계급을 연상시키는 사무라이라는 명칭의 통치 계급을 그의 신공화국에 존치시켰을까? 사무라이 엘리트계급에게 웰스가 요구한 것은 ‘금욕’을 통한 ‘자기절제’였다. 이 자기절제는 청교도적 프로테스탄티즘이 요구하는 사치와 쾌락의 제어, 즉 청빈과 통한다. 어찌 보면 신공화국 통치 계급에게 웰스가 요구한 것은 이 청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20세기 공정사회를 구상하면서 화두로 잡은 것은 정치·경제 시스템의 변혁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제한하고 지역성을 타파하여 지구의 북반구(서유럽과 미국)와 남반부의 경제적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었다.
앞서 이 글의 도입부에서 제기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자는 운동은 이미 공정무역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국제개발부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가 후원하는 「윤리적 상거래 발의」 위원회가 1998년 설립되어 윤리적 상거래에 대한 전 지구적 차원의 대중운동을 벌여 소비자들에게 윤리적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 기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소외된 생산자(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에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자는 노력을 선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유럽공정무역협회European Fair Trade Association, EFTA, 유럽세계상점네트워크Network of European Worldshops, NEWS!, 세계공정무역상표기구Fairtrade Labelling Organization International, FLO, 세계공정무역기구World Fair Trade Oraganization, WFTO 등등의 국제 민간단체들이 공정무역을 관행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직 시장에서 공정무역 제품의 인지도는 여전히 낮고 공정무역이 상품의 시장가격을 교란하는 일종의 보조금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들리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생산자(노동자)와 소비자가 서로 상생하는 공정무역의 바람은 이미 불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웰스가 그의 『모던 유토피아』에서 구상한 공정사회 구현은 미력하나마 태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웰스가 말했듯이 공정사회 구현은 타인에 대한 긍휼심을 회복하여 탐욕을 억제하고 상생과 공존의 윤리를 회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