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에서 지향하고 있는 이상사회가 갖는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 홍길동이 보여준 문제의식과 현실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가출하려는 아들을 만류하며 아버지 홍대감이 길동에게 “호부호형을 허許하노라”라는 말을 건네는 순간이다. 소설의 줄거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이 말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만큼 소설 전체를 압도하는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 대목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 길동의 아픔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극적인 순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호부호형을 할 수 없는 길동의 한은, 반인륜적 차별로 인한 아픔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는다. 길동이 느껴야 했던 울분과 설움은 조선사회가 축첩제도를 허용하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으로 내세운 적서차별에서 비롯하였다.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독점적 권력을 강화하는 방안이기도 했던 적서차별 제도는, 서얼로 태어난 개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멸과 아픔을 강요했다. 호부호형의 불허는 이런 아픔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에 해당한다.
조선사회의 모순은 철저한 신분제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적 차별에서 비롯하였다. 길동은 이러한 신분적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씨가 따로 없다’는 전복적인 사유를 가진 인물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결정되는 신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대장부로서의 포부를 가진 길동에게 이러한 사회제도는 결코 순순히 따를 수 없는 불합리한 족쇄이자 장벽이었다. 이런 부당함을 절감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사회적 불평등을 제도화한 사회에서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결국 제도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출발은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없다’는 만민평등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신분제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온한 모반의 사유이다. 조선사회에서 금지된 욕망을 가진 길동은, 결국 율도국이라는 이상적인 국가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출발선상에 호부호형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은 공공기관에 비치된 서류들에 예시로 적혀있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어느새 ‘홍길동’은 전 국민적 대표성을 지닌 이름이 되었다. 유교는 고려 이후 국가 통치의 지배원리였으며 통치방식이 민주화된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삶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유교 국가에서 쟁쟁한 적자들의 이름을 제치고 서자로 태어나 설움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홍길동이 국민을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홍길동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복합적인 성격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가 이처럼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한국문화의 내면화된 가치로 자리 잡고 있는 충효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낸 인물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당대의 보편적 질서를 부정한 불온한 상상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질서를 내면화한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였다. 비록 서자였지만 아버지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고자 하였고, 천한 신분으로 모멸을 견뎌야 했던 어머니에 대해서도 지극한 효심을 보여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했던 이복형에 대해서도 형제애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족 내 배제와 차별의 방식을 강화했던 조선사회에서, 그는 혈연과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인물이다. 이처럼 길동은 사회적으로는 불온한 인물이었지만 가족 내에서는 가족공동체를 지키고자 한 순종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된 가치가 공존하는 홍길동의 성격은 사회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비록 도적 떼에 몸을 담았지만 의로운 도적이었고, 탐관오리나 승려의 부패를 응징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충성스러운 임금의 신하로 남고자 하였다.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신분제 사회가 강요한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근대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조선사회를 지탱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놓여있는 충효라는 유교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맹종한 체제 내적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중적 면이 인물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면서 오늘날까지 강렬한 이미지로 그를 우리 곁에 남게 한 중요한 동인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홍길동이라는 이미지와 그에 대한 지지는, 그가 보여준 당대 사회에 대한 위반과 공모의 이중성이 동시적으로 작동한 결과라 하겠다.
이처럼 소설 『홍길동전』은 ‘호부호형’을 불허하는 당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과 함께, 당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충효에 기반을 둔 유교적 가치를 뼛속까지 내면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상충하는 인식들이 공존하지만, 홍길동의 기본적인 세계 인식은 중세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율도국이 신분제 사회를 골간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홍길동전』의 작자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자가 허균이라고 밝혀져 있는 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허균의 삶이 『홍길동전』에 담긴 사회적 문제의식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허균의 창작으로 보는 데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작자를 허균으로 볼 때, 『홍길동전』은 더욱 흥미로운 소설로 읽힌다는 사실이다.
허균은 조선사회의 내적 변화에 대한 요구가 점증하던 시기를 살다간 불우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제자였고 형 허봉은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였다. 누나 허난설헌 역시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명문가에서 태어난 허균은 첩의 소생은 아니었지만 후처의 자식이었으며 사회적으로 배제된 그룹인 서얼들과 곧잘 어울렸다. 그에게 시를 가르친 스승 이달李達은 어머니가 천한 종이라서 사회적 무시를 견디며 방랑시인으로 살다간 비운의 인물이었다. 또한 허균은 젊은 나이에 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 중에 아내와 아들을 잃는 아픔도 감내해야 했다. 이런 개인사적 불행과 국가적 환난은 그에게 조선사회의 모순을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많은 서얼들과 어울렸고 조선의 인재 선발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논리적인 글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호민론豪民論」이라는 글에서는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누며 사회의 변혁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짚어낸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호민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로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래,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실에 순응하며 억압과 착취를 묵묵하게 견디는 이들을 허균은 ‘항민恒民’이라 하고 이들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항민과는 달리 자신이 처한 현실을 탄식하고 푸념하는 이들을 ‘원민怨民’이라 하고 이들 또한 두려운 존재는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통치자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이들이 ‘호민豪民’임을 간파하였다. 현실의 모순을 타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시민상을 호민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허균은 백성을 세 부류의 집단으로 나누어 파악하면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시민적 주체인 호민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상정하였다.
「호민론」에서 그려내고 있는 호민의 특성은 주인공 홍길동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호민은 원민과 항민을 이끌며 역사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인식이 소설을 통해 그려졌다면, 『홍길동전』은 호민이 어떻게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가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배제된 호민에 대한 인식은 조선사회의 인재 선발 방식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하늘이 낸 재능을 적재적소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신분의 귀천에 따라 배제와 차별을 제도화함으로써 재능을 썩히고 있다고 통탄한 「유재론遺才論」에서 허균은, ‘하늘이 재능 있는 사람을 낳은 것은 원래 한번 쓰자고 해서이다’라며 재능 있는 인재를 중용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개탄한다. 견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재능을 가진 자발적인 시민에 기반을 둔 이상사회를 꿈꾼 허균이 결국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것은 어쩌면 예견된 말로였으리라. 허균이 죽은 뒤 광해군은 그의 죽음을 알리는 교서에서 그를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조선의 아웃사이더들인 서얼들과 가깝게 지낸 그는 당대의 지배층에게는 어쩌면 용납불가능한 불온한 이단아였을 것이다. 실제로 『홍길동전』의 세부적인 모티브는 일곱 명의 서자들의 반란으로 불리는 ‘칠서지옥七庶之獄, 1613년’에서 일정 부분을 차용하고 있고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도적으로 이름을 떨쳐서 『조선왕조실록』에 명시되어 있는 실명實名이기도 하다.
이렇게 급진적인 생각을 품었던 허균이 율도국이라는 이상국을 상상하는 데 있어서 봉건적인 구체제를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그가 발 딛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수용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나가고자 했다는 점에서 현실적 대안의 모색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홍대감이 “호부호형을 허許하노라”라며 울분에 찬 길동을 달래고자 하였다면, 조선사회는 ‘율도국을 허許하노라’라며 왕도주의를 실현할 이상사회를 사상적 지향점으로 열어놓고 있었다.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국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모색한 유토피아는 ‘왕도주의적 유토피아’로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동아시아 사회가 지속적으로 꿈꾸어온 왕도주의적 유토피아를 율도국이라는 공간에 실현시켜 보고자 하였다. 이는 유교적 이상을 내세운 봉건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유토피아였다. 이러한 열망이 소설이라는 시민적 형식을 통해 발현되었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은 한국판 유토피아 문학의 근대적 기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꿈꾼 이상국은 조선사회가 지속적으로 지향해나가야 할 국가였지 조선사회를 대체할 대안국가의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홍길동전』은 유교사회의 모순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유교적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