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 일반적으로 인생 세간의 고민과 갈등이 없는, 선경仙境과 같은 세상을 이야기할 때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떠올린다. 가끔 언론매체에서 구약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낙원 ‘에덴동산’의 실제 위치에 대한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릉도원의 실제 위치를 고증하는 기사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시간적으로 너무나 먼, 인류의 기억 너머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릉도원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대체로 중국의 호남湖南 성 무릉武陵 현 동정호洞庭湖의 서남쪽을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무릉武陵 산 기슭 원강元江 강변으로 추정한다. 이곳 외에도 ‘무릉’이나 ‘도원’과 같은 지명을 가진 지역이 있다. 상덕常德 시의 도원桃源 현과 장가계張家界 시의 무릉원武陵源 자연풍경구自然風景區도 무릉도원의 실제 위치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와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리면 강원도 두타산의 무릉계곡 등 한국에도 무릉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무릉은 이미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려한 자연풍경과 목가적이고 인후한 인심을 지닌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적 유토피아의 대명사로 알려진 무릉도원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무릉도원은 동진東晉 시대 문인 도연명陶淵明의 산문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하였다. 「도화원기」는 진晉나라 때 무릉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숲 속의 물길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세속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처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동아시아적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도화원기」는 서양적 이상향을 보여주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서구의 이상향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유토피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사회임에 비해,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사회이다. 모어의 유토피아가 정치·경제적 제도의 완전함을 전제로 한다면 도연명의 도화원은 그런 제도적 구비 없이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목가적인 농촌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화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세상은 아니었고 분명 외부와 격리된 사회였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있었다. 하루는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가 얼마나 왔는지 길을 잃고 말았는데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만나게 되었다. 강가에는 수백 보 거리에 다른 나무는 보이지 않고 향기로운 풀들만 아름다웠고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끝까지 가보았다. 그 숲의 끝에 강물의 시원이 나왔고 산 하나가 나타났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부는 배를 버리고 동굴로 들어갔다. 입구는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는데, 수십 보를 더 들어가니 앞이 환하게 탁 트였다.
이 대목에서 도연명은 어부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쓰고 있다. 대개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게 마련인데, 어부는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상류로 향하다 도화원의 입구를 발견한다. 그곳은 강물의 발원지가 있고 복숭아꽃이 만발한 곳으로 태초의 순수한 낙원을 떠올린다. 또 도연명은 어부가 ‘배를 버렸다捨船’라고 쓰고 있다. 상고시대上古時代 수인燧人은 인간에게 불 사용법과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배는 문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배를 버렸다는 것은 도화원에 도달하려면 문명의 도구를 버려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배를 버리고 좁은 동굴로 들어가니 갈수록 넓어지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는 것은 인류의 모태母胎로의 회귀를 연상시킨다.
넓고 평탄한 토지가 펼쳐지고 아름다운 집들이 즐비하였다. 기름진 전답과 연못이 있고 뽕나무 대나무 등이 빽빽하였다. 논밭은 사방팔방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 가운데 오고가는 사람들, 밭을 매는 사람들, 남녀 모두 옷차림은 바깥세상 사람들과 같았다.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모두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도화원기」는 비현실적인 서사인 동시에 누구에게나 낯익은 전원의 풍경화와 같은 현실 세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 즉, 도화원은 세상과 격리된 세계이면서도 그 생활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도연명이 추구하는 유토피아는 제도적 완전성을 전제로 하는 세상이 아니라 범속한 일상을 영위하면서 노동을 즐기고 탐욕과 지배욕을 버리면 어디서나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이다.
그곳 사람 하나가 어부를 보고 깜짝 놀라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어부는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어부를 집으로 초대했고, 술상을 차리고 닭을 잡아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마을에서는 어부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두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다.
어부가 목격한 도화원의 모습은 전혀 새로울 바 없는 일상적 풍경이었다. 농사짓는 모습부터 의복이나 손님을 대접하는 예절까지, 도화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부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외지인을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어부를 극진히 대접할 뿐만 아니라, 어부가 묻는 질문에도 꾸미거나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대답한다.
마을사람이 말하길 “선대 조상들이 진秦나라 때 전란을 피해 처자와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세상과 격리된 이곳으로 왔고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외부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물었는데, 위魏, 진晉은 물론 한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부는 자세하게 아는 것을 말해주었고, 마을사람 모두 감탄하며 놀라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어부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고, 모두 술과 음식을 내어서 대접했다. 어부는 며칠간 머물다가 작별을 고하였는데, 마을사람 중 누군가가 말했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도화원은 새로운 제도나 통치방식을 전제로 하는 곳이 아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또한 별스럽거나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곳이 외부세계와 다른 것은 외지인을 경계하여 끌고 가서 심문하는 관청도 마을의 수장도 없다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화원을 나선 어부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무릉의 태수太守이다.
어부는 그곳에서 나와 배를 타고, 곧 이전에 왔던 길을 따라 곳곳에 표시해 두었다. 어부는 군郡에 도착하자 태수를 찾아가 이와 같은 일이 있었노라고 알렸다. 태수는 곧장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갔던 길을 따라가 이전에 표시해 둔 곳을 찾게 했다. 그러나 끝내 길을 잃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南陽 땅 류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인데 이 이야기를 듣자, 흔연히 찾아가 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곳을 찾지 못하였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후로 아무도 도화원에 대해 묻는 이가 없었다.
도화원은 세속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렇게 잊히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후 중국역사에서 도화원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상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중국인의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의 기록은 이미 「도화원기」 이전, 공자의 「대동大同」이나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사상적으로 공자의 ‘대동’사회와 도연명의 ‘도화원’은 다르다. 우선 공자의 대동사회는 ‘덕치德治’의 제도화를 통해 실현되는 유가적 이상향이다.
큰 도가 행해질 때 천하는 공유공평하였으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고, 신의와 화목함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자식만을 돌보지 않으며, 노인은 죽을 때까지 편안하였으며, 장정은 쓰이는 바가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라도록 돌봤으며, 홀아비, 과부, 고아, 외롭고 병든 자들 모두 부양받는 바가 있었고, 남자는 역할이 있었으며,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었고,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꺼리지만 자기 것으로 저장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힘써 일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나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여 힘쓰지는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잔꾀가 일어나지 아니했으니 도둑과 난적들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이 있어도 닫지 않는 세상이니, 이를 일러 대동大同이라 한다.
공자는 ‘대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요임금에서 주나라 무왕에 이르는 이상적 통치체제를 설명하고, 이러한 이상국가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자 역시 대동사회가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음을 한탄하며, 현실은 소강小康사회임을 애석해하고 있다. 「대동」과 비교하면 도연명의 ‘도화원’은 사상적으로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작을수록, 백성은 적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도연명이 살았던 동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삶을 피폐시킨, 국가를 확장하고자 하는 토지 겸병 전쟁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도연명은 중국역사에서 가장 혼란했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동진東晉 말기부터 송宋대 초기까지 살았던 문인이다. 이 시대는 끊임없는 전란과 관리들의 전횡과 부패로 인해 국가는 혼란에 빠져있고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유가적 이상주의를 통치의 지향점으로 내세우는 위정자들의 위선과 전횡을 목도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은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자연에 은둔하며 현묘한 이치를 논하고 청담淸談을 즐겼다. 이들이 이상향으로 상상한 사회가 바로 노자가 말한 소국과민의 세상이었다. 당시 출현한 죽림칠현竹林七賢 1) 역시 은일한 삶을 실현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이다. 죽림칠현은 자신들만의 무정부주의적 사유를 실현하고자 했던 문인공동체라 할 수 있다. 도연명이 「도화원기」와 함께 쓴 「도화원시桃花源詩」는 제도적 통치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 측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봄누에로부터 긴 실을 얻고, 가을에 수확을 해도 왕에게 바치는 세금은 없다.
……
책력의 표시 없어도, 사철은 저절로 한해를 이룬다.
기쁘면서 즐거움이 넘치는데, 무엇 때문에 지혜를 쓴다고 수고하리.
도연명이 그려낸 '도화원'은 이 시기 청담사상과 마찬가지로 노장사상에 뿌리를 둔 무정부주의적 성격이 강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연명은 죽림칠현처럼 은둔생활을 하던 지식인들과는 분명 다른데, 그것은 바로 노동하는 삶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연명의 많은 작품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한편, 직접 노동에 참여하고 평민들과 어우러진 삶의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도화원기」 외에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도 나타난다.
참된 마음을 주고받는 친지들과 정겨운 이야기! 이것만이 내 기쁨이요,
거문고와 책, 이것만이 내 즐거움이라, 온갖 시름 다 실어 보내는데,
농사꾼이 네게 와 봄이 왔다 일러주니 나도 서쪽으로 밭갈이 가야겠네.
……
청명한 날이면 홀로 산책을 하고, 지팡이 세워두고 밭일을 하여보자.
동녘 언덕에 올라 시도 읊어보고 냇가에서 시 한수 지어보리라!
「도화원기」에 펼쳐진 세상은 ‘다스림治’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이와는 달리 공자의 대동세상은 ‘다스림治’를 전제로 가능한 세상이다. 청나라 말기의 개혁적 관료이자 지식인이었던 강유위는 「대동서大同書」를 저술하여 새로운 중국을 대동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문학 텍스트에 구현된 대동의 유토피아를 현실 속에 실현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러나 도연명의 도화원은 이상적인 제도의 완비를 전제로 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안분지족安分知足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나 실현 가능한 사회이다. 인위적 제도를 넘어서 자연과 공존하는 무위의 공간, 「도화원기」가 그려내는 이상향의 모습이다. 과잉의 통치 아래 삶의 피로가 극단에 도달한 오늘날 우리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