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인물 엔리케 오소리오의 정체와 그가 쓴 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1부가 역사와 유토피아에 관한 피글리아의 세계관을 보여준다면, 2부에는 새로운 상황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렌시는 독재정권에 의해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인물인 삼촌을 직접 찾아 나선다. 기차를 타고 그가 편지를 보낸 국경지방의 한 소도시에 도착한 후 마중을 나오기로 한 삼촌을 기다리지만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이후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체스클럽에서 삼촌과 종종 함께 술을 마시곤 한다는 타르뎁스키라는 인물과 우연히 조우한다. 그런데 타르뎁스키 역시 이주의 경험이 있는 망명자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도중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피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피난선을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이곳에 도착해 수십 년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타르뎁스키가 쏟아내는 개인사는 아르헨티나 문학과 서구 지성계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이어진다. 소설은 그를 통해 이 나라가 겪은 근대의 모습을 조망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피글리아는 보르헤스 문학의 특징, 즉 역사적 인물들 사이로 허구적 인물을 넌지시 끼워넣기도 하고 없던 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창출해내는 방식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2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르뎁스키와의 대화에는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복잡하게 뒤섞인다. 이렇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밑에서 공부하던 유럽 변방 출신 망명자의 시선으로 아르헨티나 역사의 다시쓰기가 진행된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현대가 유럽 모델을 흉내 낸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독립 이후 국가형성 시기부터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틀을 고수한 결과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문명’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프랑스어 경구가 학생들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유럽 출신의 지식인들만이 학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타르뎁스키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 ‘나’는 지금까지 아르헨티나가 유럽의 모델을 남미에 가장 잘 정착시켰다고 믿었으나 이는 공식역사가 주입한 허상이었으며, 200년 동안 아르헨티나 역사는 서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문명과 야만’은 아르헨티나를 왜곡된 유토피아로 이끈 이분법적 딜레마였던 것이고, ‘문명’에 대한 잘못된 정의는 현재 조국을 군부독재라는 야만의 현실로 내몬 원인이었다.
『인공호흡』은 이처럼 아르헨티나의 역사에서 유토피아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의심하면서 지워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가 그토록 따라가고자 했던 유럽의 근대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타르뎁스키는 런던 대학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책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놀랄 만큼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 가지 추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는 히틀러의 책이 17세기 철학자의 책에 반대하여 이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놓은 작품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서설』을 추종하여 모방한 일종의 위작 속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논리로 삼는 데카르트의 사상은 서구 근대의 출발점이자 기반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나’라는 주체의 중심성을 강조한 데카르트적 사고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때 문제는 발생하기 시작한다. 나와는 다른 타자他者,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등을 말살한 독일 민족우월주의와 파시즘, 인종청소와 같은 참혹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었냐고 타르뎁스티는 반문한다. 그는 히틀러가 촉발한 전쟁과 폭력, 공포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합리화를 추구한 근대세계에 오점을 남긴 돌연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데카르트 이후 서구가 발전하면서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진보와 발전을 약속한 근대세계는 20세기 초 광기와 독선에 사로잡힌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문명세계가 야만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소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유럽은 아르헨티나에게 완벽한 모델이자 절대적 진실이었을까? 19세기 이래로 서구 문명을 따라가려 했던 유토피아의 기획은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을까? 현재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실패와 현실의 충격은 단순히 서구를 잘못 모방하여 일어났던 문제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피글리아는 군사정권의 파시즘 속에서 20세기 히틀러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따르고자 했던 유럽 자체가 안고 있는 심각한 위기와 자기모순을 확인한다. 세계의 변방인 라틴아메리카의 남쪽 끝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소설은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을 넘어 종국에는 20세기 유럽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 이를 해체한다.
십대 시절 히틀러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넘치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열정과 야망을 가진 그는 예술가들이 자주 다니는 카페에 들러 그들과 교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카페에 들렀던 사람이 소설가 카프카였으며, 타르뎁스키는 히틀러와 카프카가 한 곳에서 만났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그의 ―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 논문 1940년 「히틀러와 카프카의 엇갈린 만남: 연구를 위한 가설」은 그렇게 탄생했다. 화가가 되고 싶은 한 소년은 이후 20세기 서구세계를 전쟁과 폭력으로 몰아놓은 광기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한 장소에서 동시에 머물렀던 다른 한 사람은 전체주의가 만들어내는 공포를 절망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을 쓰면서 그에 저항했다. 서구의 근대는 이렇게 완전히 다른 두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피글리아는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결합하고, 우연과 필연을 뒤섞으면서 세계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재창조한다. 근대 세계는 디스토피아를 향하는 시나리오를 써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피글리아는 다시 카프카의 예를 든다. 그는 자신을 외줄 위에 서서 이쪽 끝부터 반대쪽까지 건너가야 하는 곡예사에 비유한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도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지만 반대편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줄을 친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야 하는 것이 소설가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기댈 곳도 없고, 한 곳에 머물 수도 없는 정처 없는 망명자의 운명과도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망명자라는 조건은 현재에 안주하거나 불합리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타르뎁스키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동이 틀 때까지 끝내 삼촌은 나타나지 않고 소설은 끝난다. 끝까지 부재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마기 삼촌을 닮은 것처럼 『인공호흡』의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잡힐 듯 잘 잡히지 않는다. 소설은 단순하게 군부독재의 잔혹상을 비판하는 반독재소설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다른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피글리아가 그린 이탈한 시간은 다가올 미래가 아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속에서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대화와 편지의 형식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피글리아는 서구 근대세계가 처한 문제점뿐 아니라 주변부 국가가 처한 딜레마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쫓겨난 이들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현재 속한 곳과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결국 삼촌을 만나지 못하는 결말은 아르헨티나, 미국, 유럽 어디에서도 이상적인 공간을 찾을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근대의 기획도, 서구의 근대를 모방하려는 노력도 파국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런 측면에서 『인공호흡』은 소위 제3세계 혹은 주변부 유토피아론의 역사를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성찰지점을 제공한다. 진보와 발전에 대한 관념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성취하려는 노력도 서구와 유럽의 상상력을 빌려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모방 유토피아들을 시도한 결과로 결국 실패와 좌절의 현실에 직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글리아는 실패자들이 기록한 역사의 잔해들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찾아내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피글리아는 유토피아의 모형을 설계하기보다는 폐허가 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유토피아의 윤리에 대해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천재나 지도자가 나타나 세계의 완벽한 설계도를 구현하는 것은 가짜이고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우리는 그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되 파국의 현실에서 도피처를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과거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타자와의 소통을 꿈꾸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과 헤어지면서 타르뎁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마기) 교수님은 그 문서를 당신에게 남긴 겁니다. 오늘 교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그건 꼭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했다, 그분이 그 문서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했고, 그걸 넘겨줄 사람으로 당신을 골랐다는 점입니다.
오소리오의 문서가 단절된 시간을 뛰어넘어 마기 삼촌과 주인공을 이어주듯, 피글리아는 독자들이 자신의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과 대화하기를 멈추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의지와,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호기심과 상상력이 바로 유토피아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이런 측면에서 군부독재의 파시즘 하에서도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상향을 열망하는 것은 세계에 산소를 공급하는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그의 바람은 한글로 번역된 책을 통해 지구의 반대편,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끝도 모를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다시 꿈을 꾸어야 할 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