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반,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가였다. 그렇지만 아즈텍, 마야, 잉카 등 선주민 문명의 기반 위에 스페인, 포르투갈 정복자들의 식민화가 겹쳐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대륙의 남쪽 끝에 위치한 이 주변국에는 인적, 물적, 문화적 토대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브라질을 제외하고 남미 대륙에서 가장 커다란 영토를 소유하였고 팜파스라는 비옥한 대평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구도시인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미개척지로 남아있었다. 이곳에 거주하고 개발을 진행할 인구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공백 상태로 남아있던 당대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공동체 건설이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험하고 구체화하기에 더 적합한 환경이 되기도 했다.
문인이면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이기도 한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는 『문명과 야만 – 후안 파쿤도 키로사의 생애』1845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라는 신생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했고, 이 설계도는 향후 아르헨티나의 국가 발전 전략의 인식론적인 토대 역할을 하게 된다. 사르미엔토는 정치적으로는 좀 더 이른 시기에 독립을 이루었던 북쪽의 미국을 모델로, 사회문화적으로는 유럽, 그중에서도 ‘문명국’ 프랑스를 도달해야 할 이상과 목표로 상정한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원주민들의 종교와 삶, 농경사회의 전통, 가우초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의 풍습, 유색 인종의 문화를 국가 발전을 위해 사라져야 할 ‘야만’의 상태이자 역사적 퇴보로 간주한다. 이 이분법적 전략에 따라 아르헨티나는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럽으로부터 백인 이민을 장려하고 서구화를 가속화 하였다.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농축산물의 대량수출을 바탕으로 세계 3대 부국의 대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당시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넓은 16차선 도로가 건설되고,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과 문화시설이 지어졌다. 라틴아메리카에 파리에 버금가는 문명을 이룩하려는 꿈이 생각보다 일찍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 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70년대 말, 이 꿈은 악몽의 현실로 변하고 만다. 1976년 비엘라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아르헨티나는 독재체제로 전환되었다. 유례 없는 철권통치를 시행하던 1979년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정부에 의한 납치, 구속, 실종, 언론탄압, 사상검증이 도시의 공기를 휘감고 있었다. 평범한 동네의 건물 지하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과 젊은 대학생들을 감금하고 고문하는 무시무시한 장소로 바뀌고,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등지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안보와 사회질서라는 명목으로 국가가 자신의 국민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이 시기를 후대의 역사는 ‘더러운 전쟁’ 혹은 ‘추악한 전쟁’Dirty War으로 기록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다양한 ‘포스트’ 사조의 선구자로 알려진 보르헤스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 소설가 리카르도 피글리아Ricardo Piglia가 1980년에 쓴 대표작 『인공호흡』엄지영 역, 문학동네은 이 암울한 시기를 다룬 일종의 ‘유토피아 탐정소설’이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자유롭게 말할 수 없고 숨쉬기조차 어려웠던 당시의 억압적인 시대적 상황을 암시한다. 소식이 끊겼던 삼촌에게서 온 편지가 단서가 되어 주인공과 독자는 추리의 세계로 초대된다. 그러나 실종된 삼촌의 행방을 찾는 과정을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 독재정권의 폭력을 비판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작가는 복잡한 시간여행의 티켓을 독자들의 손에 쥐여준다.
개인 간에 주고받는 사소한 편지조차 검열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을 피글리아는 ‘말할 수 없는 시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작가에게 가장 긴급한 질문이 되며, 이런 이유로 현재의 시간을 이탈하는 작업은 피글리아에게 긴요한 전략이 된다. 총 2부로 나누어진 소설의 1부에서 주인공인 나, 렌시는 사랑을 소재로 한 시시껄렁한 장편을 발표한 소설가로 어느 날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역사학자 삼촌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도시에 있다고 소식을 전한 그는 자신이 19세기 조국의 배신자로 몰려 아르헨티나 공식역사에서 사라진 엔리케 오소리오를 연구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의 도움을 청한다. 삼촌의 부탁으로 오소리오를 추적하는 주인공은 그의 손자인 전 상원의원을 만나 오소리오가 쓴 각종 문서와 편지를 보관한 궤짝을 건네받는다. 오소리오가 쓴 편지를 읽으면서 어느덧 ‘나’는 20세기 전반기를 거쳐 19세기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독립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로사스라는 독재자가 나타나 공포 정치를 시행하고 있었다. 로사스 휘하에 있었으나 조국의 자유를 위해 오소리오는 반란을 도모하게 되고 그 시도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망명의 길을 떠난다. 브라질에서 미국 뉴욕으로,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칠레로 오소리오는 평생 떠돌이 삶을 살다 쓸쓸히 운명을 달리한다. 조국을 등진 망명자라는 이유로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역사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 그의 유일한 관심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자신의 사면복권을 주장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미래의 시간을 향한 것이었고 더 나은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1853년의 일기에서 오소리오는 “나는 미래의 첫 번째 편지를 쓰고 있다”고 적어놓는다. 오소리오에게 편지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도구였겠지만 백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서슬 퍼런 군사독재 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인 주인공 렌시에게 전달되면서 이야기는 반전된다.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글쓰기 형식인 편지가 유토피아 상상을 담아내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오소리오는 다음과 같이 미래의 세대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행위를 설명한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미래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는 동안, 우리는 그 자리에 없을 뿐 아니라,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 모르는 사람과 현재시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나중에서야 서로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편지는 유토피아적인 대화 형식이다. 왜냐하면 편지는 현재를 폐기함으로써 미래를 유일한 대화 공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편지는 다른 시간들 사이에 대화의 틈을 열어놓는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 편지를 읽게 될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식역사에 적혀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견해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었다면 현재는 어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까를 그려보는 것이다. 주인공 렌시가 “우리의 삶에는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역사를 상상하는 이런 역할과 연관된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를 재해석하는 힘을 갖게 한다. 배신자로 낙인찍혀 망명을 떠난 외부자의 시각에서 서술된 과거의 잔해들을 발굴해내면서 패배자들의 이야기가 복원된다. 또한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현재의 시간은 잠시 중단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오소리오와 렌시는 편지로 이어져 자신들이 속한 현재를 멈추고 미래로 혹은 과거로 돌아가는 과정의 어느 한 순간에서 만난다. 이렇게 해서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제4의 시간이 생성된다.
피글리아는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찾는 고전적인 유토피아 문학을 반복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어떤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를 설정하고 그곳에 기반을 둔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는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상사회의 모형을 그리거나 그것의 기반이 되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나 제도에 대한 언급도 없다. 대신 역사의 탐정을 자처하는 피글리아는 시간을 우회하는 방식을 택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공식적 시간인 현재와 단절되어 사회의 주변을 정처 없이 떠돈다. 오소리오는 고국에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며 삼촌인 마기는 (독재정부에 의해) 실종된 상태다. 주인공은 마기삼촌을 통해 19세기의 오소리오를 회상하며, 오소리오가 20세기 후반의 주인공을 찾는 시간여행 속에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시간은 뒤집히고 뒤섞인다. 그렇게 이질적인 시간들이 부딪히다 교감하는 순간이 ‘섬광’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오소리오가 뉴욕의 한 작은 방에서 외롭게 미래의 세대를 향해 보내는 편지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희망이며 유토피아 실현을 위한 노력인 셈이다. 피글리아는 극단적인 자유의 억압과 사회성의 말살이라는 현실에서 망명자, 배신자, 이민자, 실종자들의 상황에 주목한다. 미스터리하지만 이들은 사실 공식 역사에 의해 지워지고 잊혀진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현재와는 다른 아르헨티나의 가능성을 찾아 과거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므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옛것에 대한 향수나, 보수적인 가치의 고수 혹은 복고에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과거를 매개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가능성, 즉 유토피아를 향한 출발점이라고 피글리아는 암시하고 있다.
(계속)
★「시간이탈자들의 역사를 찾아서 ②」는 금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