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상보육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정치권을 비롯하여 언론 등 각계 각층에서 이에 대한 찬반 논란에 뛰어들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상보육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보편적 복지의 당위성을 내세우는 반면, 반대하는 측에서는 선별적 복지가 더욱 효율적이라는 무상보육으로 인해 촉발된 논쟁은 복지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한 논의로 번져, 결국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간의 다툼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복지학도로서 하나의 복지정책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실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 논쟁이 복지가 진정 추구해야 할 큰 틀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미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또한 이러한 논쟁이 진정 국민들의 안녕을 위한 다툼이 아닌 또 다른 소모적이고 자극적인 정쟁의 일환에 그치지 않을지 우려스런 마음도 감출 수 없다.
이 논쟁의 근간이 되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분류는 1974년에 출간된 N.Gilbert와 H.Specht의 ‘사회복지정책의 차원’이라는 책에서 자원 배분의 근거로서 소개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는 급여대상과 관계된 분류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차별없이 골고루 자원이 배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복지의 정의이고, 자원을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선별적 복지의 정의이다.
문제는 이 보편적/선별적 복지의 분류는 복지정책의 수많은 분류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회복지정책의 차원'에서 Gilbert와 Specht가 제시한 기준은 사회적 배분 외에도 공급, 전달체계, 재원의 총 3가지 기준이 더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들 스스로도 정책의 성격을 설명함에 있어 자신들이 제시한 4가지 기준만으로는 복지 정책 설명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현재 논의되는 보편적, 선별적 복지의 성격 논쟁이 오직 사회적 배분이라는 기준 하나에 의해서만 분류되었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복지 정책의 본질적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정책의 성격이 보편적인지, 선별적인지에 대한 구분 역시 상대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서구복지국가에서 운영되는 아동수당을 예로 들어보자. 이 정책은 일정 연령의 아동을 양육하는 가정에 대해 보육비용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언뜻 볼 때, 아동이 있다면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가정이 수당을 지급받기 때문에 보편적인 제도라 할 수 있지만 아동의 연령대에 따라 수당을 차등 지급하는 점에 주목한다면 모든 가정에게 동일한 금액을 주는 제도에 비해 보다 선별적인 제도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보편/선별의 성격은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복지 정책들의 성격을 의논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고려해 볼 때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은 정치적, 이념적 싸움의 소재는 될지언정 복지정책의 진정한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논쟁 하에서는 정책 대결이 가치관 싸움으로 흐르기 쉽고, 정책 한 가지의 성패를 두고 보편/선별의 승리라 표현하며 이후 새로운 정책을 수립할 때에도 또 다시 단편적인 이분법 체계를 다툴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할 점은 복지정책이 바로 '국민의 욕구'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보편/선별의 기준도 욕구가 있는 대상자의 범위를 살펴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잣대일 뿐, 그 본질은 국민의 욕구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 복지정책을 설계하고 시행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겨야 할 사항은 대상 계층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얼마만큼,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으로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논의이다.
현대사회에서 복지는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다. 욕구가 정당하다면, 누구든 간에 자신의 권리에 대해 소리높여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논쟁에 시선을 빼앗겨 서로를 편 가르며 다투지 말고 보다 큰 틀에서 현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옥상옥을 만드는 정쟁 대신, 참된 복지 정책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권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나누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