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는 산, 앞으로는 논밭이 있는 나의 모교는 시내로부터 승용차로 1시간 30분 넘게 걸리는 곳에 있다. 그러다보니 기숙사 생활을 하며, 격주마다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귀가는 학업으로 힘든 생활을 보낸 학생들에게 마치 군인들의 휴가와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나의 후배들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학교 주차장에는 반갑게 기다리시는 부모님들 대신에 학원버스 아저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충을 하기 위해 수학, 과학 학원에 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요즘에는 특목고학생을 위한 전문 학원이 생겨 고등학교를 하나 더 다니는 꼴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내신 공부를 위해 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 대부분의 동기들과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신 성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과학실험대회, 전국 과학전람회, 과학토론대회, 올림피아드 등 여러 대회를 준비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여가시간에는 실험동아리와, 학술동아리, 취미동아리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이러한 활동은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재밌고, 더 배우고 싶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후배들부터 이런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실험을 하느라 바빠야 할 실험실은 실험수업이 없는 날이면 문이 잠겨있고, 대학입시 자기소개서에 한 글자라도 더 적기 위해 동아리에 이름만 들어 놓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여러 실험과 경험을 통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내신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 학생들까지도 내신에 열중하게 만들어 버렸다.
학원버스로 가득 차 있는 주차장과 굳게 잠겨있는 실험실 문, 무엇이 달라졌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대학입시정책, 학생 및 학부모들의 인식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 내 경험으로는 과학고 입시제도 변화가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내가 입학한 이후부터 과학고 입시제도가 바뀌었다. 교과부는 2010년을 시작으로 전국 과학고 모두 영재 전형을 폐지하고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대체시켰다. 이로 인해 서류전형에서 수학, 과학 관련 대회의 실적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집필고사가 폐지되면서 창의력 면접으로 대체되었다. 창의력 면접의 경우 만들기 시험처럼 진행되어 실제로 변별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과학고 입시에서 면접의 중요성이 감소하여 중학교 내신 성적 비중이 증가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과학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중 정말 과학에 흥미를 가진 학생들보다 중학교 내신을 잘 받아 그냥 한번 넣어본 학생들의 비중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입학하고 나서 학과수업과 여러 활동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내가 다닌 학교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여러 캠프들을 다니면서, 대학에 입학하고서 다른 과학고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과학고등학교의 설립은 과학영재들을 모아 교육하여 한국과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금처럼 내신 성적을 잘 받는, 그저 공부만을 잘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과학고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과학고 입시정책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