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검열하는 것은 독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독자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독자가 작가의 특정 가치관이 표현된 책을 읽었다고 해서 편향된 시각을 가질 거라고 걱정하는 것은 책읽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겨난 편견이다. 자유로운 책읽기가 독서의 본질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자가 작가의 경험과 가치관을 담고 있는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정답처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것은 어떤 부분에 감동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비판하면서 독자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여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작가의 편향된 가치관이 담긴 책을 보며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고 있다
나는 독자로서 현재 우리 사회이념과 맞지 않는 책에서 오히려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신념과 다른 신념을 표현하는 가치편향적인 작가가 쓴 작품에서 깊은 성찰과 질문을 하며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경쟁과 성공을 일반화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하는 것이 경쟁이다. 산후조리원,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가 모두 위계질서가 있어서 어느 곳 출신인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한다. 국제중이나 자사고, 일류 대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으라고 나라가 부추기고 있다. 일부 사기업이나 사교육 기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으니 부모들이 서로 자기 아이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부모도 경쟁, 아이들도 경쟁, 부러움과 무시의 눈길을 보내는 이웃들도 경쟁을 더 강화하고 탄탄하게 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경쟁이 우리 사회의 가치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다. 또한 국가 경쟁력이나 학교발전을 내세우며 개인의 자유와 행복보다는 집단의 명예나 이익을 우선에 두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권정생의『강아지똥』에서 우리 사회의 익숙한 삶과 다른 편향된 가치를 만나서 갈등하고 흠뻑 빠져든 경험이 있다. 길에 떨어진 흙덩이는 가뭄이 몹시 심해 땅이 갈라지고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품고 있던 고추와 감자를 놓아버려 죽게 했다고 자책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아지똥 역시 고추와 감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흙덩이 마음에 공감한다. 쉽게 위로하거나 비난하며 자신을 더 우월한 곳에 올려놓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흙덩이의 마음에 당사자성을 가질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자신은 어떻게 생명을 살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소망을 품는다. 나를 내세우는 일,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고 돋보이게 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 강아지똥이 민들레 싹을 만나 예쁜 꽃을 피우는 일을 함께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지 읽는 나에게도 전달됐다. 햇빛과 바람, 비와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을 때 얼마나 행복했을까?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삶과 만나면서 설렘을 가졌다. 세상을 보는 틀에 조금 변화가 온 순간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책은 부모가 아이의 행동을 ‘문제시’ 하며 칭찬과 보상으로 교정하려 하고 협박과 통제로 아이의 삶을 조정하려 하는 것도 있다. 이 작가에게 신념은 아이들은 미숙해서 빨리 어른들처럼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적응하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온갖 방법으로 고치려 하는가? 불편하고 부끄러워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덮기도 한다.
독자의 권리는 스스로 판단할 자유이다
이것이 독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우리 사회나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가치 혹은 우리 삶을 왜곡시키는 내용을 담은 책이라도 그것은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누군가 그것을 먼저 검열하고 선별해 준다면- 어떤 누군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지 불편부당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나서서 어떤 책은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몫으로 두어야 한다. 특정 책을 금서로 만들어 독자가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처럼 마녀가 던진 저주의 말 때문에 저주로부터 공주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부모가 공주를 세상과 만날 수 없는 탑에 가둔다면 공주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탑에 갇혀있는 동안 공주는 자신의 삶을 살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원하는 것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거나 주저하거나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고 매 순간 선택하며 삶을 만들어 간다. 마찬가지로 책을 검열하여 안전한 책만 읽으라고 한다면 독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려 하겠는가?
프랑스 소설가 다니엘 페나크는 저서 『소설처럼』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든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가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독자의 권리를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 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정부기관이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에 도서선정 기준을 강화하고 사실 왜곡과 좌편향적인 책을 폐기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독자가 책을 만날 수 있는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 주어야 할 도서관에 어떤 책을 둘지 말지를 제한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책과 정보를 제공해야 할 도서관의 역할을 무시하고, 독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어떤 책이든 서가에 꽂혀 있어야 독자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읽지 않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특정 누군가가 선정한 책만 있다면 독자의 권리는 갖기 어렵다. 오히려 독자에게 압박이 될 것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더 많은 편향된 책을 만나고 싶다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앎의 즐거움이 크다. 우리가 무엇을 온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부분적인 앎이다. 내가 왜,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경험하고 생각하는 만큼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만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다 나와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지닌 작가의 책을 만나면 그 작가의 틀, 렌즈로 포착한 세상을 새롭게 만나며 내가 알고 있고 옳다고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진다. 내가 무엇을 못 보고 있는지, 왜 못 보는지 발견하거나 질문을 갖게 된다. 그 책은 작가의 특정 신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가치편향적이다. 세상에 온전하고 완벽한 시선을 가진 작가는 없기 때문에 모든 책은 일정하게 가치편향적이다. 다양한 작가의 편향된 시선을 만나면서 나 자신이 좀 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의 이치나 모습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가길 바랄뿐이다. 작가의 편향된 신념으로 펼쳐놓은 근거들 속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여 공감하기도 하고 비판하면서 내 생각의 틀을 더 넓혀갈 수 있기를 바란다. 막연한 편견과 불안으로 누군가에게 공포심을 갖거나 무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유롭지 못 한 삶이다.
책읽는 즐거움을 알고 책읽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나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삶을 만나고 알아가는 속에서 내가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원하는 틀에 억지로 나를 맞추려 하면 내 자신에 대해 불만스럽고 자존감이 떨어져 자신을 속이며 살게 된다. 하지만 내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살면 어떤 어려움이나 충돌이 있을 때, 포기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이해도 넓어지고 타인과 살아가는 능력도 키워져 그만큼 기쁨도 크다. 내 신념이나 가치관이 더 보편적인 것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독자의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가 책읽기를 권하고 모든 사람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자 도서관을 만든 것도 같은 의미이다. 지식과 정보를 소수만 독점하면서 차별하는 삶이 당연시되었던 것에서 점차 모두가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다.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삶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여 찾아낸 것들을 누구나 공유하여 자신의 삶을 가꾸고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런데 지식을 검열하고 통제하려는 발상은 우리 사회를 퇴보하게 하는 것이다. 책 한 권에 모두를 만족시킬 온전한 시선이 다 담겨 있다면 누가 더 이상 책을 쓰고 책을 읽으려 하겠는가? 수많은 작가들은 편향된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독자는 자유롭게 만나면서 그 근거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질문하면서 좀 더 섬세하고 온전한 자기만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 것,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는 것이다.
책은 당연히 작가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른 편향된 신념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자연스럽게 작품 전체에 스며들게 하고 있는가의 차이다. 신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근거가 공감할 만한 것인가 아니면 모호하거나 비판할만한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독자의 역할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 작가의 신념을 만나는가 아닌가, 깊게 포옹하듯 만나는가 스치듯 만나는가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자신의 신념을 책에 담는 사람이다. 당연하고 익숙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것,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내놓고 그 몫을 독자들에게 남기는 것이다. 강요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주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특정 책이 그럴 염려가 있어 검열한다는 것은 독자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독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과감히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세상이라는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나고 갈등하며 어려움을 직면하며 살게 될지 불안과 기대감을 같이 갖고 있다. 세상에 나와 있는 다양한 관점의 지식과 정보를 만나면서 불안감과 두려움이 줄어들고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자유로움을 느끼는 삶이다. 그래서 어떤 신념을 표현한 책이라도 호기심이 생기면 읽어보고 싶다. 세상에 있는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읽을 의지도 없다. 독자의 권리를 최대한 누릴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의에 의해 제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무슨 책이든 어떻게 읽든 자유롭게 만나 사고하고 옳다고 믿는 것을 표현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얼마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사회가 될 것인가? 얼마나 다양한 신념이 서로 부딪히며 풍성한 대화의 장이 펼쳐질까?
그 속에서 나 자신이 뭘 모르는지 뭘 보지 못했는지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너 자신을 알라’고한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우리는 평생 내 자신을 알아가고 가꾸며 살아간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뭘 모르는지는 알 수 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한 가치관과 만나면서 앎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 그 이전에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동시에 내 삶이 지속되기 때문에 앎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면서 내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편향된 시선의 책을 읽으며 나를 완성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런 과정이 참으로 설레고 흥분되는 순간들이고 이후에 만나게 될 삶에 대한 기대로 오늘을 행복하게 한다. 이런 기쁨을 어떤 권력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내 자유를 위해서. 어떤 책에서 무엇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독서의 본질은 자유로운 책읽기
『어린이책의 역사』에서 저자 페리 노들만은 독자의 정의를 ‘책에 대한 자기 이해를 갖는 사람’이라고 한다. 책과 책읽기에 대한 정의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책에는 모두가 알아야 하는 정답이 따로 있거나 절대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자의 책읽기를 통해서 책은 독자와 만나 어떤 반응을 일으키고 그 결과는 독자의 그 책에 대한 감상이다. 책읽기는 개인의 일이다. 내가 활동하는 어린이책시민연대는 독서문화운동을 하면서 내세우는 모토가 있다. 평등한 책읽기, 자유로운 책읽기, 꿈꾸는 책읽기다. 평등한 책읽기는 모든 사람이 책과 쉽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말하고, 자유로운 책읽기는 독서의 본질이다. 꿈꾸는 책읽기는 독서의 목적에 해당한다. 책과 독자의 만남으로 행복한 삶을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꿈은 억지로 꿀 수 있거나 명령으로 가능하지 않다. 각자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자유로운 책읽기를 해야만 꿈꾸는 책읽기가 가능해진다.
자유로운 책읽기는 어떤 책을 읽을 자유와 읽지 않을 자유에서 독자가 어떤 책을 만나 일으키는 반응에 관한 것이다. 아무 반응이 없을 수도 있고 독자의 마음속에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한다. 공감하거나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고 기쁨, 희망, 질문, 고민으로 남기도 한다. 책을 읽는 것은 개인이 지금껏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의 집합체인 전 존재가 책과 만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일으키는 반응의 결과가 독자의 감상인 것이다. 어떤 책이 모든 사람에게 특정한 사고를 심어줄 거라고 하는 것은 기계적이고 단순한 생각이다. 작가는 한 권의 책을 쓰지만 그 파장은 독자의 숫자만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독특한 개인들이 모여 풍성한 빛깔을 만들 듯 책을 읽으며 나타날 반응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책을 검열하겠다고 하는 것은 독서의 본질인 ‘자유로운 책읽기’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책이 정답이나 진리를 심어준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은 독자의 의지가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