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이야기꾼 스승들
돌아보면 나를 이야기의 세계로 이끈 스승이 세 분 계신다. 어머니는 내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등잔불 밑에서 밤늦도록 뜨개질을 하며 어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는 소리가 아닌 공감각적 이미지였다. 한글을 몰랐던 어머니는 『헨젤과 그레텔』을 ‘순배와 남철이’로 각색해서 들려주셨고, 『백조왕자』,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비롯한 숱한 이야기들을 낮은 한숨과 함께 들려주었다. 졸음을 못 이기고 그 나즉한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던 나는 아침에 아궁이 앞에서 뒷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곤 하였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는 책 한 권 없던 궁핍한 시절, 낯설고 흥미진진한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끈 최초의 책이었다.
두 번째 스승은 중학교 이 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두꺼운 책 한 권을 교실로 들고 오셨다. 토머스 하디의 『테스』였다. 가을 내내 수업하기 전에 선생님은 교탁에 비스듬하게 기대서서 낭랑하게, 때론 물기 젖은 소리로 『테스』를 소리 내 읽어내려 갔다. 교실 안 열다섯 소녀들은 마음을 졸여가며 때로는 훌쩍거려가며 주인공의 운명을 따라 출렁거렸다. 누군가 책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말없이 웃기만 하셨다. 충주댐 수몰 예정 지역에 있던 학교에는 그 흔한 도서실도 없었다. 궁벽진 산골이라 달리 책을 살만한 곳도 없었다. 선생님이 읽어주시기만을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열다섯 나의 가을은 『테스』를 듣기 위해 국어 시간을 간절하게 기다린 시간으로 기억된다. 문학 작품의 주인공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경험을 안겨준 국어 선생님은 처음으로 ‘책을 갖고 싶다’ ‘등잔불 밑에서 은밀하게 책을 읽고 싶다’라는 소망을 갖게 한 최초의 스승이었다.
스승은 연극배우처럼 짐짓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시를 낭송해주곤 하셨다. 수업시간에 들어오셔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시집을 펼쳐 들고 격정적으로 시를 읊으셨다. 신동엽의 「금강」을, 신경림의 「농무」를,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의 시들을……. 그 시들은 그렇게 내게 박혔다. 암울했던 80년대 중반, 고요하고 잠잠한 교육대학생들의 가슴에 들불을 지폈던 스승. 그가 낭송하는 시를 들으며 때론 주먹을 움켜쥐었고, 나지막하게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하였다.
스승은 수업 시간에 낭송했던 시집을 출판사로부터 할인된 가격으로 대량 구입하여 한 권씩 사서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가난한 우리는 종종 시집을 산 뒤 돈을 주지 못하기도 하였다. (내 기억에 문학과지성사 시집 세트값은 아직도 갚지 못했다.) 스승이 낭송한 시를 읽으며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흉내 내며 쓴 시가 내 삶을 앞서나가는 바람에 격동의 공간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골방에서 읊조리는 시가 아닌 광장에서 몸으로 쓰는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스승은 그렇게 나를 세상으로 안내하고, 삶과 시가 일치하도록 등을 떠민 존재였다.
이야기를 갈망하는 아이들
“선생님, 옛날 얘기해 주세요.”
초등학교 아이들이 학년 구분 없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공부가 힘들거나 더위에 지칠 때, 혹은 선생이 짬이 나서 두리번거릴 때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다. 옛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도 아니고, 아이들의 부모 또한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세대가 아님에도,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이야기 듣기를 원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현대인은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 인간이지만 동시에 전통시대 인간의 후예’라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을 확인한다. 의식적으로는 옛이야기를 들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모든 것이 통용되던’ 전통시대 인간의 DNA가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간절한 바람 덕분에 옛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를 이 세계로 이끈 세 분의 스승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흉내를 내면서 나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꾼의 씨앗을 발견하였다.
교사로서 교육적 목적을 품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 날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진정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깊숙이 감춰져 들리지 않던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의 세계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흥에 겨워 시작된 이야기의 세계는 옛이야기, 그림책, 동화, 시 읽기로 점점 넓어졌다.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책 읽기 문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읽어주기가 아닌 함께 읽기
흔히 ‘그림책 읽어주기’, ‘옛이야기 들려주기’란 말을 한다. 그런데 ‘읽어주기, 들려주기’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나 또한 그런 말을 별 고민 없이 썼다. 그런데 왜 불편할까? 곰곰이 들여다보니 ‘~주기’란 말에 담긴 호혜적 느낌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이야기 세계에서 근 이십여 년을 놀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야기 세계에서 노는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무아지경으로 놀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거나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하고 풍요로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함께 이야기를 즐길 때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그것을 내게 가르쳐주곤 한다. 그걸 확인하면서 ‘~주기’란 말을 쓰는 것은 적어도 내겐 얼토당토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림책을 읽을 때 나는 글을 읽고, 아이들은 그림을 읽는다. 나는 소리로 된 이야기를 읽고, 아이들은 침묵하는 이미지의 이야기를 읽고 나눈다. 그림책에서 들리는 두 개의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이다. 혼자 읽으면서 듣지 못한 이야기의 세계는 함께 읽으면서 아름다운 협주곡으로 연주된다. 그림이 들려주는 침묵의 이야기를 아이들은 직관을 동원하여 날카롭고 풍요롭게 읽은 뒤 함께 읽는 동무들과 내게 들려준다. 그러면서 텍스트는 새롭게 구성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뛰논다. 아이들은 용케도 눈이 어두운 내가 미처 읽지 못한 그림 이야기를 발견하곤 흥분과 감동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런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하는 말은 몇 마디의 감탄사가 전부이다. “오~~우! 와~~~! 어쩜 그걸 알아챘니?” 온몸으로 감동을 표현할 뿐이다.
함께 하는 그림책 읽기는 낱낱의 존재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을 준다. 골방에서 침묵으로 읽던 책 읽기에서 광장에서 소리 높여 읽는 책 읽기이다. 함께 읽는 이의 반응을 보며 내 안의 감동을 나누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머리를 조아린다. 머리에 쌓아두는 책 읽기가 아닌 가슴을 박동하게 하고,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책 읽기로 나아간다. 한 권의 그림책을 읽을 때 보통 사오십 분은 너끈히 걸린다. 『오러와 오도』는 칠십 분을 읽었다. 아이들이 그림책 읽는 내내 손을 들고 자기 생각을 말하느라 걸음이 지체된 거다. 나중엔 글을 읽는 나나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들이나 모두 지쳤던 기억이 난다. 혼자 읽기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소통을 넘어 교감이 일어날 때 스스로 책을 읽고 싶은 욕망에 불이 붙는다. 우리 교실에선 아이들이 심심할 때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 ‘이야기 멍석’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놀이에 지쳤을 때 ‘이야기 멍석’을 찾아온다. 책꽂이에 꽂아 둔 책을 골라 엎드려 읽기도 하고, 드러누워 읽기도 한다. (참고로 나는 천 여권의 그림책을 교실에 뺑 돌아가며 꽂아 두었다.) 무더운 여름, 나 또한 책 읽는 아이 곁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소리 내어 책을 읽을 때 내 흉내를 낸다는 점이다.
함께 읽기의 경험이 만드는 평생 독자
다른 교과 시간에 ‘도대체 어떤 놈이 수학을 만들었냐?’라고 나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말하는 아이가 그림책 시간엔 얼마나 손을 자주 들고 발표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지. ‘나는 공부 못하는 애예요, 나 글자 하나도 모른단 말이에요.’ 울먹이던 아이는 이야기 흐름을 따라 웃거나 찡그리고, 입을 헤~ 벌린 채 몰입하기도 한다.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직접 책을 뒤적이며 말하기도 하고, 말할 때를 놓친 아이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면이라도 기어이 못다 한 제 생각을 풀어놓기도 한다. 누구의 생각이 옳고 그른지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귀가 열리고 마음이 출렁이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동네로 마실을 떠나게 된다.
아이들이 들려주는 그림 이야기에 대해 내가 하는 일은 적극적인 공감과 조금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가려고 애쓰기보다는 제 렌즈로 읽고 생각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그림책을 함께 읽을 때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내 생각엔~’ ‘내가 보기엔~’이다. 한 권의 책을 만날 때 철저히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한다. 내 생각이 소중하다는 경험은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소통을 넘어 관계 회복이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때때로 맞설 때 아이들은 창조의 주체로 자리 잡는다. 창조적 주체가 되는 경험은 책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신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아이들은 집에서 읽은 책을 가져와 함께 읽자고 하기도 하고, 나에게 ‘감동적인 책이니까 꼭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책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신뢰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권위 있는 사람의 평가에 무조건 기대지 않고 스스로 책을 골라 읽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림책을 함께 읽을 때 감동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오류를 수정해 주기는 하지만, 비웃거나 자만하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아이, 교과공부에 자신 없어 하는 아이를 글 읽는 교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굳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책에서 배운 바를 삶으로, 몸으로 조용히 옮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내 삶의 거울이며, 그림책의 스승이라고 거푸 말한다. 훈계하거나 가르치려는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터득하고 배움을 완성해 나간다. 이런 과정, 즉 함께 읽기와 듣기의 충분한 경험 속에서 아이들은 평생 독자로서 조금씩 성장해간다.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 가는 책 읽기 문화’는 ‘함께 읽기’를 얼마나 많이, 풍요롭게 경험했느냐가 관건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읽으라고 말하기 전에, 함께 읽읍시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