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적의도서관은 기적을 이루었나?
발제자께서 던진 질문을 보면서 10년 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기적의도서관 건립을 위해 구성된 분과위원회에서 누군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기적인 나라라니, 서글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서관이 수험생 독서실로만 여겨지던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갑작스레 도서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던 심정을 담은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그 질문을 보면서 ‘기적을 이루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특히, 발제문에서 강조한 것처럼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서비스와 도서관 건축의 혁신이라는 면에서는 몇 십 년에 걸쳐서도 기대하기 힘든 변화를 이루어냈다고 봅니다. 기적의도서관 사업을 시작한 2003년 당시 4년 차의 사립문고를 운영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도서관재단과 사립공공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민간 도서관운동가의 눈으로 볼 때 기적의도서관은 우리나라 도서관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한국도서관의 역사를 기적의도서관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봐야 할 거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기적의도서관이 도서관문화에 미친 영향은 범위가 굉장히 넓습니다.
도서관에 대한 인식의 변화
무엇보다 기적의도서관의 성과는 도서관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를 완전히 다르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막이 달린 책상, 숨소리도 조심스러워지게 만드는 정적, 가방을 메고 좌석을 배정받으려고 줄지어 선 수험생들을 떠올렸습니다. 간혹 낡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서고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독서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의도서관이 등장한 뒤로는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가지런히 책이 꽂혀있는 책들이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책꽂이로 둘러싸인 따뜻하고 활기 넘치는 공간에서 편안하게 뒹굴며 책을 읽는 풍경, 앞치마를 입은 사서가 책을 읽어주는 모습, 책을 펼쳐놓고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풍경…….
도서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도서관에 대한 관심과 요구, 기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전까지 도서관 이용자들의 요구라면 좌석 수, 개방시간, 소음, 구내식당의 메뉴에 대한 민원 정도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이용자들이 장서에 관심을 갖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각자의 재능과 시간을 내어 다양한 활동을 도모하기도 합니다. 도서관 건립을 위해 지역에서 모금을 하고 마을축제를 벌입니다.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느냐가 이사할 집을 구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도서관이 삶 터와 일상에서 소중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변화들입니다. 겨우 십 년 만에 사람들의 의식에 이런 변화를 불러일으키다니, 틀림없이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도서관 발전의 전기 : 어린이서비스와 도서관 건축에 눈을 뜨다
이렇게 폭넓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힘은 건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의도서관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불모지였다고 할 수 있는 도서관건축 분야에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2002년 도서관학교 강좌를 기획하면서 도서관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해 강의해줄 분을 찾느라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듣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도서관 건축은 아직 ….”이라는 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 아니 2003년 첫해부터 이미 전국적으로 도서관건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새롭게 세워지는 도서관들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완전히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도서관인들에게도 건물과 공간이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부터 이용대상을 확장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체험을 통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서고에 대한 아쉬움이나 제한된 운영인력으로는 개방할 수 없는 사각이 생기는 등 공간구성에서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다음 순서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니 저는 기적의도서관 건축의 의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적의도서관 건축의 미덕은 단지 건축학적인 가치만이 아니라, 이용자들에게 자긍심과 자존감을 불어넣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14년째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책을 건네는 일이 한 사람의 존엄함에 말을 거는 일이라는 걸 체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의도서관이 보여준 건축 미학은 참으로 도서관다웠고, 도서관의 가치를 구현하는 토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서관 정책의 변화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자체 선거 때면 도서관 건립과 활성화가 후보자들의 정책과 공약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비전과 현실적인 방안을 담아내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느끼고 정작 실행이 되지 않아서 실망할 때도 있지만, 도서관법의 공공도서관 범위에 어린이도서관이 포함된 것, 국립중앙도서관의 작은도서관진흥팀 설치 등 정부의 굵직한 도서관 정책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도서관계의 모든 변화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겠지만, 기적의도서관이 불러일으킨 묵직한 진동이 없었더라면 사뭇 다른 양상, 다른 속도를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도서관 자체가 기적을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산을 옮기는 기적보다 사람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기적의도서관은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도서관의 수를 늘리고 각 도서관에서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폭풍 같았던 기적의 여진
짧은 시간에 기적 같은 변화를 일으킨 데에는 많은 사람이 지혜와 힘을 모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대적인 파급력을 가졌던 데에는 방송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MBC 느낌표 프로그램은 방송이 가질 수 있는 공익성을 최대한 발휘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했던 모든 사람이 너무 빨리 끓어오르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이렇게 도서관이 화두가 될 때가 또 있겠냐는 생각이 자꾸 욕심을 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도서관 구석구석이 전국에 TV로 보여지는 기회에 꼭 담고 싶은 요소들에 매달렸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점자통합그림책’이었습니다.
점자그림책 104권을 ‘보여주기 위한’ 서비스가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어서 최종 결재를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결국, 개관일을 일주일밖에 안 남은 시점에 준비해두었던 목록의 책을 서점 물류창고에서 직접 골라다가 한국점자도서관에 떠안기다시피 해서 야간작업으로 간신히 104권의 점자그림책을 개관에 맞춰 배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 개관한 모든 기적의도서관이 점자통합그림책을 초기장서로 수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점자통합그림책 이용이 활성화되려면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홍보하고 서비스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하고, 아직 관련된 인프라가 거의 없는 도서관 현장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전국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때에 살짝 그 필요성이라도 알릴 수 있다면, 그래서 기적의도서관만이라도 몇 권씩 점자가 붙은 책을 갖게 된다면, 그다음은 각 도서관에서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기적의도서관은 그런 상징적인 의미도 가졌습니다.
방송과 함께 사업을 진행한다는 건 시간싸움이었습니다. 방송일이 정해지면 꼼짝 없이 날짜를 지켜야 해서 시한폭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말을 주고받을 만큼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느낌표 프로그램을 언제까지 연장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방송의 힘이 발휘된 만큼 겪어야 하는 대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개관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서귀포기적의도서관은 전체 건물이 타원형인데다 창이 워낙 많고 창문 하나하나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서 빗물이 스며드는 게 큰 문제였지만 5월 5일로 정해진 방송날짜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 밤늦도록 물을 닦아내고 창호작업을 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습니다. 개관이 임박한 시점에 5백 권, 천 권씩 기업이나 단체에서 자료를 기증하겠다는 반가운 소식도 정리실무를 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날벼락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살짝 털어놓자면, 개관식 당일에도 일부 서가에는 등록도 안 된 책들을 띠라벨만 붙여 꽂아놓고는 누가 대출해달라고 할까봐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
기적의도서관 건립비용이 모두 느낌표 선정도서의 판매 수익금을 위주로 조성된 기금으로 충당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업을 추진하는 종자돈이 힘을 가졌던 것도 분명합니다. 당초 기적의도서관 선정을 둘러싸고 지자체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도서관 건립을 희망한 지자체가 50군데에 달하고 선정되지 않은 곳에서는 크게 상처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민관협력에서 보기 드물게 민이 주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건립비의 상당부분을 지원한 기금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상황이 가능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빠른 시간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일으킨 만큼, 긍정적인 성과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업 초기에는 느낌표의 도서 선정을 둘러싼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책’과 ‘어린이’라는, 누구도 의미를 부정하기 어려운 가치를 덧씌워 ‘면죄부’로 삼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보면 그런 비판을 넘어설 만큼 가치 있는 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실제로 기적의도서관이 보여준 변화들은 그만한 가치를 가졌다고 봅니다. 다만, 그 가치가 도서관문화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스며들기 위해서는 지난 과정에서 불거졌던 문제와 비판에 새삼 귀를 기울이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의도서관에 한 자락 손을 보태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 가운데 하나가 ‘평가’를 할 여유가 없이 숨차게 일이 진행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방송의 힘이 컸던 만큼 초기의 추진력은 멈춰 서면 돌이키기 힘든 동적 균형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십 년 사이, 어찌 보면 손을 떠난 공처럼 감당하기 힘들 만큼 전국 도서관계로 영향력이 확대된 만큼, 멈춰 서서 돌아보고 다시 길을 찾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심포지엄은 참으로 반가운 자리입니다. 다만, 프로그램, 장서, 공간, 도서관과 지역문화에 끼친 영향까지, 이 많은 주제를 한나절 만에 다룰 수 있을까 싶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쪼록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기적의도서관의 의미를 다시 자리매김하고 다음 단계를 그려보는 자리가 좀 더 넉넉하게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
2. 도서관에서의 민관협력
도서관에서 민관협력의 다양한 시도를 촉발하다
발제자께서 강조한 것처럼 기적의도서관은 민관협력을 지향했습니다. 11개 기적의도서관을 민관협력으로 건립한 것만이 아니라, 도서관계에서 다양하게 민관협력이 시도될 수 있도록 촉발시킨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적의 도서관에서 시도된 민관협력의 특징은 실제로 그 범위가 넓고 포괄적이었습니다. 방송을 통한 민간의 모금과 기부가 이루어졌고, 지자체에서는 부지와 건립비 일부를 부담하고 운영을 맡았습니다. 건립준비위원회를 거쳐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일부 기적의도서관은 민간위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민간 도서관 운영자들이 직접 관장으로 운영을 맡기도 했습니다. 자원활동도 유례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민간 도서관운동의 성과를 담다
기적의도서관의 민관협력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점은 건축부터 장서, 서비스, 프로그램까지 그동안 민간 도서관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시도와 성과를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민간 도서관에는 도서관운동으로 꿈꾸던 일들이 마침내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추고 실현될 것 같다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당시 사립문고였던 느티나무도서관에서는 기적의도서관 건축을 맡은 기용건축에서 찾아와 구석구석 공간을 스케치하였는데, 그제야 아이들이 좋아하던 작은 방을 ‘모태공간’이라고 하고, 도서관에 들어가 보고 싶도록 하려고 벽화를 그리고 미끄럼틀을 달아놓았던 입구의 공간을 ‘전이공간’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재연 의원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 기용건축 팀원으로 공간의 참고사례를 보려고 도서관에 찾아왔을 때입니다.
각각의 공간이 이름을 찾게 된 것만이 아니라, 몇 배로 큰 공간에서 멋지게 구현되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상가지하의 좁은 공간이었지만, 편안하게 책도 읽어주고 둘러앉아 맘껏 떠들 수 있도록 꾸민 골방, 걸음마 하는 아기들 눈높이에 책표지가 보이도록 만든 책꽂이, 아기 젖을 먹이거나 잠시 재울 수 있도록 달랑 이불 하나 펼쳐둔 공간, 놀이터에서 달려온 아이들 손도 씻고 어린아이 우유도 타 먹일 수 있도록 마련해둔 싱크대, 벽화를 그리고 미끄럼틀을 설치한 입구…. 제한된 면적과 예산 때문에 늘 궁여지책으로 만들었던 공간들이 열 배도 넘는 멋진 건물에서 훌륭한 건축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쳐 마술처럼 구현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어디서나 공공도서관 건립을 새로 기획할 때 책 읽어주는 공간, 소모임 공간, 수유공간에 기저귀교환대 같은 설비까지 빠뜨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 영향력을 실감합니다.
몇 년 동안 수없이 책을 고르고 솎아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목록이 초기 장서목록으로 활용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섬세하게 이용자를 고려하는 서비스와 다양하게 시도된 독서프로그램까지 거의 모든 컨텐츠가 총망라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도서관 운영, 자료선정, 프로그램 등을 비롯해 조례안 작성까지 주제별로 분과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몇 달 앞서 대구에서 열렸던 2002년 전국도서관대회에서 책읽는사회의 서해성 전 사무처장과 만나 뭔가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협조요청을 받았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십여 년 동안 사립공공도서관을 운영해온 새벗도서관 신남희 관장, 파랑새어린이도서관의 전영순 관장님, 청주 초롱이네도서관 오혜자 관장님, 당시 동화기차어린이도서관의 팀장이었던 이진우 성북정보도서관장, 등 주로 어린이도서관 운영자들이 개관준비위원장을 맡거나 분과위원회, 지역별 건립준비위원회, 운영위원회 등에 참여해 기적의도서관 설립취지를 구체적으로 도서관 운영과 서비스에 담아냈습니다. 민간 도서관운동의 현장관 관련 분야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관장으로 채용된 사례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의 허순영 관장님과 인표어린이도서관 본부에서 활동했던 최지혜 현 남이섬도서관장님이 각각 순천과 부평의 관장을 맡았습니다. 시작부터 큰 몫을 맡아 십주년을 맞이하는 허 관장님은 아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깊은 감회에 젖어계실 거라고 짐작합니다.
다양한 수위로 참여한 민간 도서관 현장의 활동가들이 그간의 경험을 모두 쏟아내는 자리가 이어졌습니다. 어린이전용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을 놓고, 공공도서관이냐 전문도서관이냐 관종을 정하는 것부터 지자체에서 직영할 것인지 위탁운영을 할 것인지, 어린이 위주의 장서를 어떻게 분류하고 배가할지, 고민하고 결정할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몇몇 사람의 이런 경험은 민간의 다른 도서관들에도 다양한 경로로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배우고 길을 찾아가는 교류의 기회
민간 도서관들에게는 도서관운동의 역할에 대해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기적의도서관 사업을 시작한 2003년 마침 제가 운영하던 느티나무도서관은 재단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도서관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운영주체가 필요하다는 걸 확인하고 법인설립을 시도하면서, 어떤 비전을 갖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지 고민하고 있었지요. 일상 활동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는 시기에 기적의도서관 사업은 도서관계 현실을 짧은 시간에 밀도 있게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길을 찾고 사업을 기획하는 데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 여러 가지 사업을 함께 도모하는 동지로 신뢰를 쌓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민간 도서관운동가들에게는 도서관 실무와 행정체계를 경험하고 배우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30~40평 규모의 도서관을 거의 시스템이 아니라 몸으로 때우는 식으로 운영하던 사람들이 시설, 인력, 장서, 모두 상당한 규모를 갖춘 도서관 하나를 만드는 전 과정을 체험하면서 어떤 절차와 자원이 필요한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순천과 서귀포기적의도서관 건립과정을 거들면서 배운 것이 몇 년 뒤 느티나무도서관을 건립할 때 크게 도움이 되었지요.
건립과정에서 민이 이니셔티브를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운영주체는 명백히 시, 군, 구 등 지자체였기 때문에 행정시스템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공무원 직급 체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 같은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면서, 다양한 주체가 협력할 때에는 좀 더 큰 눈으로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관장의 직급을 5급으로 할 것이냐 6급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 (물론, 위원회에 결정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개관 후 확실한 권한을 가지려면 조금이라도 높은 직급을 확보하는 게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직급이 너무 높으면 지역의 다른 도서관들과의 관계나 지자체 관련 부서와 협력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말하자면 왕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차, 했던 기억이 납니다. 꿈을 구현하려면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인정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모든 평가가 민간에서 도서관운동을 하던 사람의 눈으로 본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이런 자리에 관의 입장에서, 현장 사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분들이 함께 했더라면 참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적의도서관이 민관협력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이야기해보는 기회가 언제든 다시 마련되길, 책읽는사회나 학계에 기대합니다.
민관협력,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협력할 것인가
기적의도서관으로 촉발된 도서관에서의 민관협력은 그 형태와 내용이 백 가지로 다양하게 구현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민간 주체에게 공립도서관의 운영을 위탁하는 예도 있고 민간의 전문가를 관장으로 채용하는 예도 있습니다. 정책 수립 과정에 민간이 참여할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법적으로 자문기구나 심의기구의 위상을 갖는 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합니다. 공모사업이나 시범운영사례를 지정하는 형태로 예산을 지원하기도 하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순회사서 등 인력을 지원하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민간의 활동가들이 필요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일종의 기술지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형태는 또 다양한 사례로 나타납니다. 민간위탁만 해도 권한과 책임의 범위, 협력의 내용과 수위 등에 따라 넓은 스펙트럼을 보입니다.
민관협력의 사례는 그렇게 다양하고 사례마다 평가도 모두 달라질 수 있겠지만, 분명한 공통점 하나는 민관협력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기적의도서관 추진과정에서도 초기에 유력한 후보지였던 대구를 비롯해 결국 계획이 무산된 고양시, 우여곡절 끝에 선정된 울산 북구 등에서는 건립비와 운영권 등을 놓고 지자체와 지난한 협상을 거쳤습니다. 저는 초기 운영조례분과위원으로 참여한 데 이어 잠시 순천의 개관준비 TF와 서귀포기적의도서관 개관준비위원장을 맡았던 뒤로는 직접 관여하지 않아 깊이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건립과정보다 이후 운영과정에 민관협력의 난이도는 훨씬 높았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뿐입니다. 여전히 진행형인 것으로 알고 있고요.
기적의도서관 건립 과정은 민간은 민간대로, 관은 관대로 각자 경험의 한계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은 행정과 법을 잘 알지 못한 채 꿈과 열정만 가득했고 관에서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다른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거버넌스’는 ‘유토피아’와 같은 낱말 아니냐고 자조적인 표현이 튀어나오 때가 있습니다.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이냐는 의문이 들 만큼 무력감이 들기 때문이지요. 정말 실현 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가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군가 의미를 부여하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아직까지 우리 도서관 현실은 좀 더 다양한 민관협력의 사례를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민과 관의 운영원리를 서로가 더 잘 이해하고 서로가 어떤 몫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는 만나고 토론하고 함께 일을 도모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례가 시도되기 위해서는 유연함과 여유도 필요할 것입니다. 때론 누군가 가이드라인 같은 걸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막막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정답을 찾으려고 들기보다는 조금 긴 안목으로, 큰 흐름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여유를 갖게 된 데에도 기적의도서관 경험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생각과 경험이 다른 주체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도모할 때 서로에게 신뢰와 기대를 가져야 시너지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기적의도서관 준비과정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도서관에 삶을 건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논쟁도 치열했습니다. 이견을 좁히지 못해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옳다고 분명하게 평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절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처럼 다르고 낯설게 보이는 방안도 시간이 흘러 그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서 다르게 평가하는 체험을 한 것이지요. 협력을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무언가를 요구하려면 그만큼 내어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지혜도 얻었습니다.
발제자께서는 기적의도서관이자 민간위탁 도서관으로 부평기적의도서관을 건립하고 운영하면서 누구보다 민관협력을 화두로 많은 고민을 하셨을 줄 압니다. 민관협력이 도서관건립에 그치지 않고 도서관운영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도서관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면서, 법적 행정적 틀 안에 도서관의 역동성을 담아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을지 (혹은, 과연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는지)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3. 어린이도서관, 기적의 다음 단계는?
발제자께서 기적의도서관의 지향으로 언급한 것처럼, 기적의도서관은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으로 출발했습니다. 제가 경기도 용인시에서 사립문고를 준비하던 1999년만 해도 책을 보고 골라야 하는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없어서 멀리 서울까지 가서 대형서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일찍이 1920년대부터 종로도서관의 전신인 경성도서관에서 아동관을 설치한 예가 있지만, 2000년대초까지 어린이도서관이라고 하면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전국에 14군데 인표어린이도서관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공공도서관 규모는 아니었고, 나머지는 모두 민간에서 만든 사립문고였습니다.
이제 전국의 공공도서관마다 어린이실을 확장하거나 새롭게 조성하고 어린이서비스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공공도서관 837개관 가운데 84개관이 기적의도서관을 포함한 어린이도서관입니다. 그 가운데 1979년에 문을 연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을 빼면 모두 기적의도서관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공공도서관만이 아닙니다. 학교도서관이 활성화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쳐 공간구성이나 장서, 프로그램에서 기적의도서관이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2006년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의 개관에도 기적의도서관이 불러일으킨 어린이서비스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개관준비 과정에도 기적의도서관 건립 경험이 반영되고 관계자들의 참여가 이루어졌습니다.
십 년 전 어린이도서관 건립은 도서관 현실에서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전국 공공도서관의 10퍼센트가 어린이도서관이라는 현재 상황은 진지하게 숙고해봐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아이들이 맘껏 책을 만나고 꿈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사회적 책무이지만, 전체 도서관문화를 놓고 볼 때 균형을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랐습니다. 아마 ‘기적의도서관을 경험하면서 자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는 전국 모든 기적의도서관에서 고민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10년이면 아이들에게는 이미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간 세월이니까요. 아무리 자유와 자율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어린이’라는 수식어가 아이들을 대상화하게 되는 한계도 고민할 일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아이들과 함께’ 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공성의 확대라는 도서관의 기본적인 사명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느티나무도서관도 사립문고로 문을 연 초기에는 ‘어린이도서관’이었던 터라 더욱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참고로 느티나무도서관은 2007년 도서관법의 기준에 맞춘 건물을 짓고 공공도서관으로 등록하면서 도서관 이름에서 ‘어린이’를 떼어냈습니다. 공공성의 확장에 대한 기대와 전체 공공도서관의 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싶다는 바람이었습니다. 책읽는사회와 기적의도서관은 또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던 처지에서 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니 다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이 떠오릅니다.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은 사서의 힘과 공공도서관의 잠재적인 역동성을 보여준 사례로 저를 포함한 많은 도서관인들이 덩달아 가슴 뛰며 응원을 보냈습니다. 책읽는사회의 위탁운영 소식이 저에게는 환상의 팀을 구성한 사서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어린이전용으로 출발한 기적의도서관들이 좀 더 많은 도서관들에 폭넓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또 다른 차원의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지요. 기대했던 만큼 위탁 만료와 환상팀의 해체는 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도서관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 큰 힘이 되었지만, 어린이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작은도서관으로 지나치게 기울면서 이제 도서관계가 풀어야 할 큰 숙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헌신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측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에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서 한걸음 물러나 어른들 스스로 책을 읽게 되길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청년들이, 여전히 아이에게 매달린 여성들이, 인생의 2단계를 앞두고 막막해하는 중년의 남성이 책을 읽는 풍경을 보고 싶습니다. 기적이 일상이 되기 위해, 공공성을 담은 도서관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책을 읽으며 성찰하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공공성을 체득하고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고객이나 민원인이 아니라 시민을, 서비스가 아니라 도서관문화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토론문을 쓰다 보니 기적의도서관 다음 10년은 또 어떤 상상력과 도전을 보여줄까, 다시 가슴이 설렙니다. 이번 심포지엄이 미래진행형의 기적을 위해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끝으로 10년 전 나란히 법인을 설립했던 느티나무도서관재단을 대표해서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10주년에 특별한 신뢰와 응원을 담아 축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업 범위나 우선순위는 다르지만 도서관과 독서운동의 흐름을 함께하면서 고민도 나누고 시시콜콜 훈수를 둘 수도 있는 파트너가 있다는 건 참 든든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존재 자체가 거울처럼 늘 우리를 성찰하고 점검하게 만들었던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힘찬 응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