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1960년대 이후 '압축적 산업화'를 이끌었고, 1980년대 '운동에 의한 민주화'에 헌신했던 노동자인가?
'노동자'라는 명칭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노동자는 어느 사회에서든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은 대부분 임금 소득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경제활동인구의 90퍼센트 안팎을 차지한다.
자영업자의 비중이 예외적으로 큰 우리나라도 임금 소득자의 비중은 70퍼센트에 이른다. 자영업자 가운데 자신과 가족노동에 의존해 최저 수준의 소득을 얻는 영세 자영업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 역시 자신의 노동으로 삶을 운영해야 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권위주의와 싸우면서 민주화에 걸었던 가장 큰 기대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었으며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민주화 이후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이 시장 상황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종속적인 지위로 빠져들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른 정부도 아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가 정규직에 맞먹을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존재 조건이 얼마나 취약해졌는가는 잘 드러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실과 그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표상되었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정당성과 도덕성은 도전받거나 의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그런 위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갈등과 혼란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지향하는 투쟁의 목표와 방식을 달리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일반 노동자와 노조원 사이에서, 노조원과 노조 지도부 사이에서, 재벌 대기업 본사의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서, 노조에 의해 보호되는 노동자와 영세 중소기업에 광범하게 산재해 있으면서 보호되지 못하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 사이에서 누적된 갈등은 여러 형태로 표출되었다.
노동은 모든 사회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이다. 경제성장도 시장도 재벌 대기업도, 그리고 민주 정부도 모두 노동에 기반을 두고 서있다. 따라서 노동의 위기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위기의 한국 경제,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한국사회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 없는 경제, 노동 없는 시장으로 달려 나가는 한국 사회의 '바닥으로의 질주'가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도 경제도 유지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자체를 잘 제도화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서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에도 최대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성장 그 자체뿐만 아니라 성장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는 공동체적 결속을 다져야 한다. 그것은 사회 발전의 성과물을 좀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공존을 위한 사회적 윤리를 창출하는 공동체 위에 시장과 경제를 올려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핵심에 노동이 위치해 있다.
노동의 시민권이 노사 관계와 정당 체제에서 취약해질 때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는 것,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