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다시 태어난다면?
사회자 : 다른 것을 여쭤 볼게요.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신지요.
박남준 :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회자 : 악기 연주가 혹은 보컬인가요?
박남준 : 아니요. 작곡가입니다.
사회자 : 혹시 이유가 있으시다면?
박남준 : 글을 쓰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즉 가시적인 행위죠?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그러한 형태가 있다면 음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집에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어서 음반을 2천여 장 소장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평균 서너 장을 구입합니다. 가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서 음반 소장에 대해 물어보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가난한 시인이란 말이야. 음반 구매를 많이 해서 뼛골이 시리다.” 이렇게 말합니다.(웃음)
사회자 : 네. 감사합니다. 하종강 선생님은 다시 태어난다면? 외모는 멜로 배우 같지 않으세요?(웃음)
하종강 : 일본 배우 중에 ‘키타마 다케시’라고 아세요? 그 사람 닮았다고 했는데(웃음) 잘 생긴 사람은 아니에요.(웃음) 제가 하는 일을 노동 운동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하는데요. 저는 삼십 년 동안 노동 운동을 했던 게 아니고, 노동자를 돕기 위해 노동 운동 일을 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노동 운동을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에게 한 번쯤 들어본 얘기가 있을 겁니다. 환갑 넘으신 아파트 청소하는 분들이 얘기입니다. 어떤 분이 복도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닫히면서 한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 들렸어요.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노동자 된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사회는 한국 사회밖에 없어요. 제가 어느 날 수배 전단을 봤습니다. 수배된 사람 얼굴 사진 밑에 인상착의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 풍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부산 지역에서 성폭행 사건이 났을 때에도 인터넷에 올라온 웹 자료를 보니깐 ‘노동자 풍에 마른 체격’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걸 아무리 경찰에 지적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참고로 제가 1980년도 5월 달에 수배되었습니다. 수배 전단이 길거리에 쫙 붙었습니다. 그때 제 얼굴 사진 밑에 쓰여 있던 세 글자가 있었으니 미남형.(웃음) 이건 가문의 전설이에요. 일가친척이 모일 때마다 이야기가 나와요. (웃음) 지난번에 우리 여동생이 하는 말이 ‘그때 수배 전단 한 장 훔쳐서 보관해야 했어. 군사독재 정권이 인정한 미남형이야.'(웃음) 저는 노동조합 위원장을 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어요. 저는 노동 운동하는 노동자가 아닙니다. 노동자를 도와주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물 한 잔 떠다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면 노동 운동을 멋지게 해보고 싶습니다.
사회자 : 다음은 순서는 최재천 선생님이신데요. 다시 태어난다면 설마 개미는 아니겠죠? (웃음)
최재천 : 아마도 저는 생물학자가 될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일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고요. 생물학을 하면서 글 쓰며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생물학을 안 한다면 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댄서가 되고 싶습니다.
사회자 : 그럼 우리 한번 볼까요? (최재천 선생님 : 절레절레)(웃음) 상상 속의 댄서입니다. (웃음) 이번에는 이희수 선생님이신데요.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으세요?
이희수 : 다시 태어난다면 저도 이 일을 또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굉장히 어렵게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전공을 갖고 자리를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거든요. 제가 256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이후로도 이 전공을 가지고 자리 잡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리 잡는 것은 힘들다고 봅니다. 만약에 나를 받아 주지 않아서 교수가 안 됐다면 석유 딜러나 거물 무기상이 됐다면, 지금보다 훨씬 생활은 나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길이 힘들지만 다시 태어나도 문화인류학의 길을 걸어갈 것 같습니다. (박수)
고등학교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일들
사회자 :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꼭 이런 것을 해 보고 싶다.”입니다. 이희수 교수님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이희수 : 고등학교 때 여러분과 똑같이 작가 선생님들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냐하면 세상은 판에 박혀 있지 않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엄청나게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거든요. 제 고등학교 동기생은 480명입니다. 졸업 당시 152명이 서울대로 갔습니다. 저의 동기생들은 아직도 연세대, 고려대 다니는 동기생들에게 인간 취급을 안 합니다. 저는 삼수를 해서 한국 외국어대학교에 갔기 때문에 아직도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지 않습니다. 그 당시 공부 못하는 특별한 아이로 낙인 찍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평생의 꼬리표잖아요. 그때 누군가 “야, 서울대학교 안 가도 네가 보람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다른 삶이 있어”라는 것을 가르쳐줬다면, 저는 날개를 달고 내 존재감을 느끼면서 자부심을 갖고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이 버려둔 것, 귀찮아하는 것,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 꼭 쓰임새가 있는 이런 일들을 찾아라.” 이 말을 꼭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남들이 철저히 버려둔 일을 고를 것입니다. (박수)
사회자 : 감사합니다. 최재천 교수님은요?
최재천 : 하종강 선생님이 학교생활 내내 턱 끈을 안 푸셨다고 했는데, 저도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어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고, 운동장에서 놀다 보면 교복을 찢고 난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새 교복 사다 주세요.’ 이런 말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학교 행사 때에는 교문에서 물건을 나눠주는 역할을 시키면 항상 저를 세웠습니다. 이 정도로 반듯한 모범생이었어요. 제가 여러분을 만나러 고등학교 특강을 많이 갑니다. 강의 제목이 ‘아름다운 방황’이라는 제목입니다. 저도 뜻하지 않게 대학교에 떨어진 경험도 있고, 삼수를 하려다가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오늘날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 당시 붙은 친구들은 대학에 떨어진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 큰 충격을 받고 난 다음에 나이가 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가출까지는 아니고 제대로 된 방황을 해보고 싶어요. 너무 ‘모범생’으로 살지 말고,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고 싶어요. 제 마음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행하지 못했거든요. 지금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B-boy들과 춤추고 있을 거예요.(웃음)(박수)
사회자 : 최재천 교수님이 B-boy들과 춤추는 게 상상이 되나요?(웃음) 멋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하종강 선생님의 얘기 들어보죠.
하종강 : 제가 다닌 고등학교도 서울대를 일백 몇십 명 보냈습니다. 아들이 저한테 하는 말이 “서울대에 일백 몇십 명을 보내는 학교에서 아빠가 지방대 갔으면 반에서 꼴찌를 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물어봅니다. 실제로 그랬어요. (웃음) 60명의 반에서 59등 했어요. 그때 60등 했던 친구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외과 과장이에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서울대반, 연고대반, 기타대반’ 이렇게 나눴어요. 조회할 때 선생님이 올라오셔서 너희 줄도 못 맞추는 ‘기타대반’이지? 이렇게 말하는 살벌한 시대에 학교를 다녔어요. 저는 꼴등을 해도 서울대학교 반이었지만 이러한 분류는 부질없습니다. 제가 민예총 진보 아카데미에서 철학 강의를 했었는데 삼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했습니다. 소개하는 첫날 한 학생이 ‘한총련 소속입니다. 학생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을 해줬습니다. 소개가 기억나서 물어봤어요. “어느 학교 다니세요?” 우리 사회는 이런 질문을 할 때 혹시 학교 후배는 아닐까? 이런 궁금증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후배라면 얼마나 반가워요. 잘해주고 싶겠죠. 그 청년이 제 물음에 답했습니다. “학벌 없는 사회를 추구하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날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홈페이지에 있는 제 정보를 찾아서 학력을 모두 지웠습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지만 팸플릿을 보시면 학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앉은 자세로 밤새도록 책을 읽은 적이 몇 번밖에 없습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였고요. 그 후에는 밤을 새워서 읽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 원인 중의 한 가지는 체력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시기에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면 그 후에 독서를 하기 참 어렵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다면 책을 정말 많이 읽고 싶습니다. 제 아들의 나이가 서른한 살이고요. 한국의 오타쿠 1세대입니다. ‘코스프레’라는 말을 사람들이 모를 때 그것을 했어요. 아들 방에 가보면 비닐 포장을 뜯지 않은 만화책만 수천 권이 있습니다. 제가 “넌 보지도 않고 뭣 하러 많이 샀느냐?” 물었습니다. 오는 대답이 “소장용입니다.” (웃음)(웃음) 저도 다시 태어나면 오타쿠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싶습니다.
박남준 : 초등학교 5학년 다닐 때 한 친구가 전학을 왔습니다. 저는 보자기에 책을 싸고 다녔는데, 그 친구는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였습니다. 일반 학생들 도시락 반찬이 김치, 깍두기, 젓갈류라고 한다면 전학을 온 친구는 소시지, 달걀 후라이, 소고기 등 있는 것이에요. 하루는 그 친구가 동화책이라는 것을 갖고 왔어요. 동화책을 빌려보려면 그 친구의 심부름을 해줘야만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상해서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빌려보지 않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마을에 도서관이 있어서 갔어요. 그 때는 가방이 있어서 책을 많이 빌리려고 했지만, 도서관에 책이 한 권도 없는 도서관이었습니다. (웃음) 하루는 국어 선생님 집에 갔는데 방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쌓여있는 것이에요. 이 벽도, 저 벽도 앞, 뒤, 사방으로 책이 쌓여있어서 놀라웠습니다. “빌려 봐도 돼요?”, “빌려 봐도 된다.” 그래서 한이 맺혔던 동화책만 다 뽑아서 빌렸어요. 가방에 잔뜩 넣은 책을 ‘낑낑’ 들고 가려는데 선생님께서 검사하셨습니다. “넌 중학교 2학년이야. 지금 무슨 소공녀? 이런 책을 보니?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이런저런 책을 봐야 한다.” 동화책을 빌려보는 수준의 학생에게 너무 높은 것을 넣어주셨어요. 저의 많은 별명 중의 하나는 ‘헌 나라 어린이’입니다. 저의 초등학교, 중학교 시대에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어린이가 새 나라의 어린이’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어린이는 헌 나라의 어린이’에요. (웃음) 제가 헌 나라 어린이였는데, 선생님 집에 가서 책을 빌려볼 때부터 또 바뀌었어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 책을 엎드려서 보게 된 경우가 자주 있었어요. 전기가 새벽에 나가서 순간 잠이 들기도 합니다. 침을 질질 흘리고 잠자서 아침에 책을 말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는 책을 많이 못 읽었어요. 일찍 타락했거든요. (웃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을 꾀어서 학교 뒷산에서 소주를 나눠 마셨어요. 제가 여러분처럼 ‘고등학교 때에 인문학읽기전국대회 같은 곳에 참석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행사를 ‘자의로 온 것인가, 부모님의 권유로 온 것인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자의로 온 거랍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부끄러워졌어요. ‘고등학교 시절에 난 왜 그 생각을 못해봤을까?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려고 유혹하고, 못살게만 했지?’ 제가 여러분에게 공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탈을 하더라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탈. ‘청소년인문학읽기전국대회’가 대학 가는 데 관계는 없다고 생각하고 도움도 안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탈로서 ‘청소년인문학읽기전국대회’에 기꺼이 오신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 아울러 이런 좋은 일탈, ‘내 스스로의 결정으로 온몸으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난 고등학교 때 못해봤을까? 스스로 물어 봤을 때 ‘내 곁에는 좋은 선생님이 없었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의 선생님들이 옆에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여러분들 오늘 행복한 겁니다.
'아름다운 세대'에게
사회자 : 네. 잘 들었습니다. 차례대로 네 분의 마지막 인사가 있겠습니다.
하종강 : 최소한 아이들이 자신만의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은 천박하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보이지 않는 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유익한 결과를 갖고 온다.’ 이렇게 설명하잖아요. 거짓말이거든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천박하다’라는 것을 최저의 값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철학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어서 노동 운동을 포기한 사람보다 동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해서 떠난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여러분이 마음먹은 삶을 살려고 할 때, 언젠가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때 꼭 이기세요. 그래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박수)
최재천 : 저는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이 이미 여러분의 세대에는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여러분의 세대를 ‘공감의 세대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저희 세대들도 남을 도울 줄 압니다. 가끔 돕고요. 하지만 도우러 갈 때 많이 계산합니다. ‘내가 지금 도와줘도 되나? 내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은데, 마감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따지고 있거든요? 제가 여러분을 보고 있으면 한심해요.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하더라고요. 이런 대화를 들었어요. “야, 너 내일 시험 있어.” 그렇게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요. 여러분은 앞뒤 구분을 못 하는 세대처럼 보여요.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깐 이 걱정이 아무 의미 없는 걱정이라고 보였어요. 위대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라. 남을 위해서 살아라.’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그런데 실제로 여러분은 그런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것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의 것을 챙겨?’(웃음) 그런데 저희 세대는 걱정이 되어서 ‘야! 그러다가 너 굶어. 일단 네가 제대로 서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거야’ 이런 구태의연한 얘기를 여러분에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착각하고 있었던 거죠. 여러분 세대는 계산 없이 남을 돕고, 내가 위험해질 때에 그가 나를 도울 것입니다.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이 남을 도와줍니다. 그런 분들이 인터뷰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무너무 힘들 때 내가 모르는 사람이 도와줬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나를 도와줬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을 우리 세대는 할 줄 몰랐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세대는 보릿고개를 겪었고, 나 자신을 챙기지 않으면 언젠가 굶어 죽는다는 위험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나를 챙겼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좀 모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도울 줄 압니다. 인류가 그렇게 오랫동안 원했던 세상을 열어줄 수 있는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문턱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남하고 함께 살아가는 그런 인류 역사상 최초의 아름다운 세대가 되어 주십시오. 우린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수)
사회자 : 여러분은 관찰당하고 계십니다.(웃음) 장난이고요.(웃음)
이희수 : 세계 인구가 70억쯤 된다고 그러죠? 그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인생 굴곡이 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각자가 다른 길을 가지 않습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좋고 나쁜 선악이 아니라 자기가 판단하는 보람의 문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좀 더 다양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을 편안하게 걸어간다.’ 라기보다는 여러분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보다 더 힘들고, 소외당하고, 아픈 사람들이 내가 닦아 놓은 길을 좀 더 편안히 걸어가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은 남이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가지 마시고, 자기 스스로 길을 닦는 그런 목표를 갖는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학을 모두 A로 졸업하고, 국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가고 싶은 대학을 고르려고 했을 때 저의 동기생들은 거의 미국에 있는 대학을 골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스탄불 대학을 골랐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국에 가는 비행기를 탈 때, 저는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던 것이 제 운명을 바꿨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스탄불 대학 550년 역사상에 제가 첫 한국 유학생이 되고, 박사학위 하면은 첫 박사 등 모든 것들을 한국 최초로 한 겁니다. 그 길을 걸어갔을 뿐인데 남들은 ‘한국인 최초, 한국인 최초’라고 말합니다. 이슬람권의 인구 15억, 57개국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세상에 한국인 전문가들이 10명도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일본이나 다른 나라 예를 봐서라도 3천여 명 정도는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을 들어가시되 경영학, 법학, 건축학, IT 등을 하시더라도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세요. 예를 들어 건축학과를 가더라도 매일 한국 건축, 서양 건축을 배우시지만 거기에서 오스만 터키 건축까지 배우신다면, 남들이 가지지 않은 탁월한 아이디어를 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 MBA만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연봉은 다소 낮게 받더라도 대한민국 5천만 명 중에 한 사람도 없는 이슬람 법령 전문가가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학문을 선택하시되 남들이 하지 않았던 첫 번째 개척자로서 길을 닦는 고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고, 이 기회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박수)
사회자 : 고맙습니다. 여러분 두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들려주신 네 분의 선생님에게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여기 네 분이 같이 있는 기회가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자리이기 때문에 포토타임을 갖겠습니다. (웃음)(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