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내가 쓴 시가 수능에 나온다면?
사회자: 지금부터 개별 질문입니다. 어느 분이 제일 어려 보이나요? 이희수 선생님께서 제일 어려 보인다. 손들어주세요. 오오, 네, 최재천 선생님께서 가장 어려 보인다. 손들어주세요. 최재천 선생님, 굴욕입니다.(웃음) 하종강 선생님께서 가장 어려 보인다. 손들어주세요. 오. 많네요. 박남준 선생님께서 어려 보인다. 오, 많네요. 그럼 선생님들 자리 배치를 왜 이렇게 했을까요? 자리 배치의 기준이 뭘까요? 가, 나, 다, 순일까요? 외모 순서일까요? (웃음) 외모 순서로 보면 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웃음) 자, 자리 배치는 나이 순서입니다. (학생들 : 오우) 여기에서 가장 막내는 박남준 선생님입니다. 멀리서 보면 모르시겠지만 가까이 보면 제일 어려 보이세요. (웃음) 안 믿는 친구들이 보여요.(웃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웃음) 자, 질문인데요. 만약에 박남준 시가 수능에 나왔다면 몇 점을 맞을까요?
박남준 : 한 60점은 맞지 않을까요?
사회자 :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남준 : ‘내가 쓴 시는 100점은 맞겠지’라고 예전에는 생각했어요. 제 시에 대해서 평론가가 쓴 글을 봤어요.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온갖 상상력을… 너무도 놀라워서 ‘한 점도 못 맞추겠다.’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점수를 높여서 ‘60점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짜장면 두 그릇 값을 들고 온 노동자
사회자 : 오, 높인 점수가 60점인가요? 신경림 시인의 작품이 수능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본인께서 수능에 나온 시 문제를 한 번 풀어본 적이 있는데 반절밖에 못 맞췄답니다. (웃음) 이번에는 하종강 선생님입니다. 하종강 선생님을 보면 노동자의 친구로 불리십니다. 아주 멋진 호칭인데요. 하종강 선생님께서 기억에 남는 노동자가 있다면 누구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보겠습니다.
하종강 : 제가 노동자들을 만난 세월이 삼십 년쯤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을 봤습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을 말하겠습니다. 조폭 생활을 하다가 해고된 노동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눈동자가 달라요. 휴가 때 안보이다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고향에 갔는데 누가 사람 하나 죽여주면 돈 삼백만 원 준다고 해서 고민 참 많이 했네.” 이런 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어떻게 죽이나?” 그랬더니 “간단해요. 포터로 바치면 아무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 그 친구가 처음 해고를 당해서 상담소에 찾아왔어요. 제가 몇 마디 말 해줬더니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오늘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런데 상담소 여직원들은 정말 싫어했어요. “말도 안 되는 농담하고, 그 사람 완전 밥맛이에요.” 이런 반응이거든요. 우리 상담소는 원칙이 있습니다. 식사 시간에 계신 손님에게는 실례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반드시 식사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식사 때만 오는 것이에요. (웃음) 12월 31일 날 그 친구에게 전화 왔어요. 다른 직원들은 오전 근무만 하고, 다 퇴근했습니다. 저 혼자 남았을 때 전화 한 통이 오더군요. “아이고 아직도 안 가셨군요. 근처 공중전화에 와서 전화 한 겁니다. 퇴근하시면 식사 같이해요.”라고 말했고,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어요. “오늘 제가 얻어먹은 신세를 갚으려고, 헐레벌떡 왔습니다. 빨리 짜장면 두 그릇 시키세요.” 저는 “자네에게 사준 짜장면이 수십 그릇인데, 올해 마지막 날에 짜장면을 먹어야겠냐? 최소 볶음밥은 먹어야지. 나는 최소 볶음밥 먹어야겠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자 “그럼 짜장면 1개, 볶음밥 1개 시켜요”라고 말했고, 그 후에 철가방 소년이 음식을 갖고 왔습니다. 탁자에 솥뚜껑만한 손으로 돈을 꺼내서 소년에게 주는데 백 원짜리 동전으로 딱 짜장면 두 그릇 값인 거예요. “짜장면 두 그릇 돈밖에 못 구했는데 씨발!” 이러는 거예요. 욕을 달고 사는 사람이니까요.(웃음) “모자라는 건 형님에게 받으세요.” 이렇게 말했고, 저는 철가방 소년에게 몇백 원을 줬어요. 그런 사람은 절대 잊을 수 없어요. 그 사람과의 사연 속에서 소설 몇 권을 쓸 정도로 사연이 많지만, 시간이 없어서 이것만 말하겠습니다. (박수)
사회자 : 잘 들었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네 분 모두 저자이시잖아요. 어느 분이 가장 책을 많이 쓰셨을 것 같아요? (학생들 : 최재천 교수님)
최재천 교수님에게 글쓰기란?
사회자 : 이유는 뭐죠? 이유는 없고요?(웃음) 실제로 제일 많이 쓰신 분을 조사해보니 최재천 선생님께서 175종을 쓰셨습니다. 이희수 선생님께서 66종. 하종강 선생님과 박남준 선생님께서 똑같이 20종을 집필했습니다. 많이 쓰셨죠? 최재천 선생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 과학자인데 글쓰기를 해서 아이들과 함께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보겠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에게 글쓰기란?”
최재천 : 밤을 새워도 될까요?(웃음) 솔직히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상합니다. 과학자는 글을 못 써야 정상이죠. 서양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과학자는 글을 잘 써야 합니다. 과학이 어려운데 남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면 글 솜씨가 필요하겠죠. 서양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과학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짤막하게 쓰면서 할 얘기만 정확하게 하기 때문에 좋은 작가들 중에는 과학을 전공했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종강 : 제가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하하하(웃음)
최재천 : (웃음) 그래서 저는 글을 쓰는 것을 잘 이용해 먹고 살아요.(웃음) 저와 정재승 선생님은 “과학자인데도 글을 조금 쓸 줄 안다.”고 봐 주시는 거죠. 저한테 글쓰기는 행복입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시는 분들 이른바 글쟁이라고 하잖아요. 그 분들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글쓰기는 제 부업이니까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저의 주업은 과학자이고, 과학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알리고 싶어서 집필을 합니다. 글쓰기가 괴로운 적은 별로 없고요. 집필 순간이 행복합니다. ‘글쓰기는 저에게 행복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
사회자 : 최재천 선생님께서 행복해 보이죠? 이번엔 이희수 선생님 차례입니다. 질문입니다. “제가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방학 때마다 이슬람 지역을 여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슬람을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가 어딘가요?”
이희수 : 20년 동안 해외여행을 다녔고, 올해엔 스물여덟 번째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지구 두 바퀴 반을 돌았는데요. 가끔 기자들이 와서 묻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다 볼 수 있습니까? 죽기 전에 가볼 만한 나라를 추천해주세요.”라고 묻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터키를 가보라 이야기합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는 보스푸러스 해협이 있습니다. 거기 1km 사이로 하나는 유럽이고, 하나는 아시아입니다. 또한 기독교와 유럽이 만납니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반경에 인류의 5천 년 역사 중 4800여 년이 몇십 킬로미터 이내에 컴퓨터 칩처럼 집적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에서 흘러가잖아요? 바로 터키에서 흘러갑니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걸렸던 아라랏 산이 터키에 있고요. 에덴동산도 있습니다. 그리고 히타이트, 아시리아 등 여러분이 들어봐도 가슴이 설레는 나라들이 있었고요. 만지면 황금으로 바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미다스 왕도 그쪽 출신이고요. 성서적으로도 보면 성모 마리아께서도 돌아가신 곳이 터키이고, 초기 7대 교회가 터키에 있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고향이 거기에 있고, 사도 바울의 생가도 있습니다. 기독교 유적이 다 있죠? 그리스보다도 더 완벽한 그리스 유적이 남아 있고, 로마보다도 더 큰 로마 도시가 터키에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의약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소아시아, 지금 터키 땅 출신이고요. 역사가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도 거기 이주민 출신입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의 탈레스도 그쪽 사람이고요. 『일리야드』, 『오디세이』의 저자 호메로스도 거기 사람입니다. 사실 축적된 오리엔트 문명이 이제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서 기원전 5세기 6세기에 그리스 문명이 꽃피웠지만 그리스 문명의 어머니 역할을 한 곳은 터키입니다. 그리고 11세기 이후에는 오스만 튀르크가 들어가서 찬란한 이슬람 유적이 남아 있죠? 지금은 EU가 터키의 가입을 받아주지 않고 있지만, EU에 가입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유럽의 최첨단의 모습도 갖추었습니다. 한 국가, 한 도시에 인류가 축적하고 경험했던 오천여 년의 역사가 한 국가에 다 축적되어 있다면 그보다 효율적인 여행지가 어디 있겠어요? 여러분이 성인이 되어서 배낭여행 계획을 세우실 때 터키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보스푸러스 다리 한 가운데 서서 그날 기분에 따라 여행하면 됩니다. 왼쪽으로 가면 유럽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아시아가 나옵니다. 여러분의 생의 여행을 보스푸러스 다리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박수)
학창시절의 별명
사회자 : 터키 홍보대사 이희수 교수님이었습니다. 삼겹살 홍보대사와 함께 두 개의 직함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웃음) 학창시절에 별명이 어떤 것이었나요? 대충 어떤 별명이 연상되세요?
학생들 : 석유 재벌! (웃음)
사회자 : 석유 재벌 좋습니다. (웃음)
이희수 : 중동이나 이슬람을 공부하기 전입니다. 얼굴이 좀 검다고 ‘깜상’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굉장히 내성적이었어요. 그래서 돌부처란 이야기가 있었고, 특별한 별명은 없었습니다. (웃음)
사회자 : 지금까지 ‘돌부처’와 ‘깜상’ 이었습니다. (웃음) 다음은 최재천 선생님 차례입니다.
최재천 : 저를 띄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라는 별명을 한때 얻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서로 좋은 별명을 안 불러주잖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금방 없었던 일처럼 별명이 사라졌습니다.(웃음) 학교 내 매점 할머니는 6년 내내 ‘이쁜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별명은 ‘죄송표’ 아저씨였습니다. 그 이유는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많이 했고, 사과하는 것을 학생 대표로 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 최재천 선생님은 예전에 문학반 아니셨나요?
최재천 : 겨우 1년 정도 하다가 슬쩍 빠져나왔습니다. (웃음)
사회자 : 이번에는 하종강 선생님의 별명을 들어보겠습니다.
하종강 : 호칭이 없는 학생은 초등학생들이 어떤 별명을 붙여 주나요? 이름을 이용하는 게 가장 흔하잖아요. 제가 성이 ‘하’씨잖아요. 지금의 제 키가 중학교 2학년 때 키입니다. 반에서 제일 컸어요. 그래서 별명이 ‘하곰’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 얘기를 듣더니 곰이 겉으로 볼 때 미련해 보이지만 상당히 영민하다. ‘곰은 생활력이 강하니깐 너도 ‘하곰’으로써 자신감을 가져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모범생이었는지 말할게요. 수십 년 동안 남학생들은 일본 육군 군복을 입혔습니다. 교복에 턱 끈을 채웠어요. 여학생들은 일본 해군 군복을 입혔습니다. 제가 얼마나 모범생이냐면 6년 동안 단추를 풀어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께 전혀 속 안 썩이고 살았습니다. 그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 성이 ‘유’ 씨였습니다. 제 이름 끝이 ‘강’ 자이잖아요. 제가 봄처럼 순해 보이지만 속으로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노력을 잘했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외유내강’이라고 불렀어요. 제 여자 친구가 성이 ‘유’ 씨고, 키도 2㎝ 큽니다. 테니스 선수 출신이어서 체격도 좋아요. “겉으로 볼 때 ‘유’ 씨가 이기는 것 같지만 안으로 볼 땐 ‘하종강’이 이기는 커플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했어요. (웃음) 그때의 여자 친구가 제 아내입니다. (학생들 : 우와.)
사회자 : 사모님이 첫 사랑이죠? (하종강 : 끄덕끄덕) 부러우세요? (웃음) 이 상황에서 최재천 교수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곰이 정말 똑똑한가요?
최재천 : (웃음), (끄덕끄덕)
사회자 : 마지막으로 박남준 선생님의 별명은 어떤 거였나요?
박남준 : 아주 어렸을 때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합주기, 합주기 합!(웃음)
어머니가 무엇을 하나 물어본다면 제가 아무런 말도 안 하다가 만정이 다 떨어지도록 날카롭게 대답을 한답니다. 온갖 정이 다 떨어진다고 해서 ‘땡비’라고 어머니가 지어주셨습니다. 친구들은 제 이름을 가지고 ‘야, 배워서 남 주냐?’ ‘야, 남준아 배워서 남 주냐?’, ‘공부해서 남 주냐?’ 이런 별명이 있었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반듯하게 보이려고 했고, 깔끔했습니다. 그래서 ‘샌님’ 같다고 들었습니다. 재미없죠?(웃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