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불과 물과 땅-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 괴테 어머니의 회고
왜 책을 읽는가?
독서 현황 조사에 따르면 미국·일본·프랑스 등의 한 달 평균 독서량이 6권 내외인데 반해 한국인은 채 1권이 되지 않는다. 또한 유엔이 정한 평균 독서량 순위로는 세계 166위다. 글로벌 경제 전쟁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에 비춰볼 때 매우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불확실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개인의 독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 기업은 독서를 지속성장을 위한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독서경영은 독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책을 읽고 공유함으로써 기업 경영에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하는 행위이므로 직원들로 하여금 평소 독서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하고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은 독서경영의 목적과 목표를 정확히 세우고 직급과 역량에 따라 차별화된 양서를 엄선해 조직원이 읽게끔 독려할 수 있다.
기업 차원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조직원이 독서 후 얻은 배움을 어떤 형태로든 서로 나누다 보면 자신뿐 아니라 공동의 성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독서경영은 기업뿐 아니라 개인과 가정, 더 나아가 국가를 변화시키는 힘인 것이다.
독서는 개인뿐 아니라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오래전부터 여러 기업이 도입하고 있는 '독서경영'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얻은 다양하고 참신한 지식과 아이디어·노하우 등을 조직원들이 서로 공유하거나 토론해 창의적인 집단지성을 도출하고 기업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는 지식과 생각의 공유를 통해 개인과 기업의 가치와 생산성을 동시에 높이는 경영전략 중 하나이며 급변하는 경영·경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독서경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점, 독서가 글로벌 경쟁시대에 중요한 무기라는 점에서 그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떠한가? 사회와 교육의 양극화를 오직 경제적 편차의 문제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가정, 특히 어머니의 독서의 양과 질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다. 미국의 보고에 따르면 책을 읽는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 아래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10년 후 학력 격차가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고 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가정에서의 독서에 소홀하다.
책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경험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느낌을 모두 공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책은 가장 짧은 시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지적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통로이다. 책은 세상의 다양한 삶과 일에 대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이해와 삶으로의 응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지식의 창고이다.
무엇을 위한 독서인가?
독서의 중요성은 언제나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왜 독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무작정 책을 많이 읽으라고 강조하는 건 효율적 독서의 매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독서를 하는가? 독서는 지식과 정보뿐 아니라 감성과 영성에 이르기까지 실용과 인간의 깊은 내면적 통찰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전통적이며 보편적 수단임은 여전하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는 독서에 대한 그러한 펑퍼짐한 이해의 근본적 변화를 동시에 요구한다.
지식과 독서의 역사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지식의 역사와 방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지식 자체가 힘이었다. 경험이건 지식이건 지니고 있는 정보는 크게 쓸모 있는 가치로 여겨졌다. 이른바 know-what의 시대였다. 이때 필요한 지적 능력은 암기능력이었다. 언제든 그 지식을 꺼내 쓸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나 암기를 잘하느냐를 가르치는 게 교육의 주된 방식이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the literate은 지배자들이었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the illiterate은 피지배자들이었다. 문자는 지식과 정보의 축적과 전달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였다. 지식은 곧 권력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로 이어졌다.
르네상스는 지식 대중화의 시발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책의 구입이 어려웠다. 그러다가 인쇄술이 발달하고 자국어로 쓰인 책들을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독서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제 더 이상 독서를 통한 지식과 정보의 수용과 전달은 특권계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사실 르네상스 이후 일반대중의 자아의식이 발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식은 know-what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의 계몽주의 열풍이 대중교육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면서 지식과 정보의 습득력이 국가의 능력과 비례한다는 자각은 경쟁적으로 독서와 교육의 발달을 촉발시켰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시민의식의 자각으로 이어졌고 프랑스혁명은 그 결정판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정치적 자아의 계발로 이어졌다면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경제적 자아의 발아로 이어졌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지식의 내용과 방법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더 이상 지식과 정보가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접근 가능성에 의해 일반화되면서 기존의 know-what의 가치는 빛을 잃었다. 같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학이나 물리학적 지식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수많은 실험과 실용적 시도가 이어졌다. 산업혁명은 바로 그러한 지식 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지식의 패러다임이 바로 know-how로서의 지식과 정보였다. 서양의 발전과 제국주의적 전환은 바로 이러한 결과물의 성격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제 know-what의 시대는 가고 know-how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그것을 따른 문명이 세상을 지배하고 거기에서 뒤처진 문명은 침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동양 문명권의 상당수 국가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인 점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식과 정보는 무엇인가?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현대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바로 컴퓨터의 출현이다. 물론 초기의 컴퓨터는 지금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컴퓨터 언어를 습득한 사람들만 다룰 수 있었고, 지식과 정보 또한 그것을 저장한 사람의 몫이었으며 다만 그것을 취합 활용하는 당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컴퓨터는 저장과 분류의 용량과 속도가 빠를 뿐 정보의 교환 수단은 아니었다. 혁명은 인터넷에서 점화되었다.
더 이상 특정한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컴퓨터 언어도 기술도 필요 없게 되었다. 그저 클릭 한 번으로 어떠한 지식과 정보의 채널에 접속할 수 있고 나의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은 마치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분수령 가운데 하나였던 인쇄술의 발달을 연상시킨다. 누구나 검색창만 열면 거의 모든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다운 받으면 소유까지 가능하다. 이제 지식과 정보의 소유는 개인의 독점적인 능력이 아니다. 최근의 고급 정보와 지식들까지 거의 망라된 인터넷의 콘텐츠는 소유뿐 아니라 운용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설령 모르거나 운용방식을 이해하지 못해도 무방하다. ‘도움받기’를 통해 노하우까지 다 얻을 수 있다. 즉 인터넷은 지식과 정보에 대한 기존의 소유와 운용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 지식의 시대인가? 이제는 know-where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더 빨리 필요한 정보에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속도가 중요한가? 그건 아니다. 어차피 지식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값의 차이를 결정하는가? 그건 바로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그리고 판단력이다. 똑같은 지식이라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또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이다. 정보화의 시대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독서와 사유가 필요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똑같은 지식과 정보라도 본인이 어떻게 가공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답을 따라가기만 하면 새로운 게 없다. 끊임없이 묻고 호기심으로 들춰봐야 한다. 상식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것들도 다른 각도로 보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데카르트의 회의가 서양 근대주의를 열었다면, 우리의 호기심과 의심 또한 현대와 탈현대를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새로운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지식과 정보뿐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면 족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올바른 인성(人性)이다. 인성의 문제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늘 이 문제는 모든 인류에게 요구된 덕목이다. 그런데 왜 새삼 인성인가?
인성과 판단력의 시대
현실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네 삶의 방식은 유기적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계들로 얽혀 살았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어떤 사원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위에 보고를 하고 많은 절차를 거치면서 가감첨삭 되고 수정되어 실무로 이어진다. 한 개인의 선택과 판단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개입된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해서도 특정 개인에게 몫이나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나누어 갖는다. 그러나 갈수록 그 유기적 체계의 관계가 대폭 축소된다. 내가 결정하고 판단할 뿐 아니라 책임도 져야 한다.
세상에는 좋은 정보뿐 아니라 나쁜 정보도 많다. 과거에 조직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결정하던 게 지금은 개개인이 판단하고 그 결과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어떤 문제를 균형 있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습득 또는 감성의 계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러한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독서는 그러한 점에서 이 시대에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수단이 된다.
실용적 목적을 위한 독서는 단순히 기능적 측면만 추구한 게 사실이다. 그게 know-what이건 know-how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기능적 측면뿐 아니라 그 지식과 정보 소유자의 인성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시대의 독서는 바로 그러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방향의 재정립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고전을 읽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죽하면 ‘고전이란, 모든 사람이 읽으라 권하면서도 결코 읽지 않는 책’이라는 자조적 정의까지 나올까? 어떤 이는 ‘일반독자’라는 희귀한 종족은 이제 서서히 멸종되고 있다고 개탄할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전을 읽으라는 건 자칫 시대착오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관점을 바꿔야 할 때다. 패러다임의 전이라는 건 기술적 또는 전략적 전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데에서 출발한다. 책의 가치에 대한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고전이 주는 보편적 가치를 섭취할 때 자신의 내면과 삶 전체를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넓게 보는 자세가 가장 넉넉하게 섭취되는 것이 독서, 특히 고전의 독서 이외에 얼마나 있겠는가? 사회가 변하면 우리의 사고의 방식도 변하고 실천의 방법도 변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나 장소에서도 변하지 않는 건 바로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폭넓은 독서는 직접적 기능적 수월성을 만족시키는 게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하고, 균형 있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이끌어준다. 21세기가 오히려 독서의 가치를 더더욱 크게 요구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exformation으로서의 독서
최근 exformation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폴 케네디나 앨 고어 같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면서 일반화되고 있는 이 말은 information에서 변형한 신조어다. information이란 낱말은 ‘in’과 ‘form’ 즉 ‘안으로 들어가 만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기존의 정보는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와 형성되는 것들이 전부 다였다. 그러나 이제는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옳고 그른 지식과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터넷망에서의 당면한 문제다. 그것을 분별하는 데 교사나 부모 또는 상사 등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을 최종 판단하는 건 개개인 자신들이다. 그러한 분별은 다양하고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따라서 독서는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습득 및 축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 기능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를 갖는다.
exformation이라는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장해보면, 이전까지의 ‘외부에서 내부로’의 형성이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로’ 즉 기존의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토대로 하되 개개인의 창의적 구성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가치의 창출을 통해 밖으로 자신의 지적 자산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적극적 개념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현대는 전문적 지식과 전문가를 요구하는 시대다. 하지만 지식의 단순한 소유와 운용은 예전의 위력을 잃었다. 그것을 활용하는 법을 깨우치되 더 나아가 이미 있는 것들을 내 안에서 새로운 가치로 재창조해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또한 전문가적 능력과 더불어 르네상스적 인간형, 즉 다양성을 동시에 갖춘 인간의 가치를 요구한다. 독서의 다양성은 바로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생산적인 대상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은 기존의 것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토대로 새로운 이해와 재구성 또는 재창조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의 가치는 갈수록 중요하다. 그러므로 독서의 일차적 태도는 기능적 수월성이 아니라 인간사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독서
상상력은 꿈이다. 꿈이 없으면 목적도 미래도 없다. 상상력의 출발은 ‘내가 누구인가?’ 즉 정체성의 확인이다. 출발점이 있으면 목적점도 있어야 한다. 꿈은 변한다. 상상력도 변한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상상력과 창의력도 바뀐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나 『나니아 연대기』가 50년 전에 나왔다면 지금처럼 그렇게 널리 읽히고 영화로 만들어졌을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건 ‘virtual reality'라는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낸 상황 때문이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해체되고 새로운 시공간 개념이 형성되면서 이전에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가능한 현실일 수 있다는 인식의 확장을 이끌었다.
그러한 개념은 사실 기존의 동화나 무협지적 공상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시공간 상의 철저한 제약 속에 사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원초적 갈망을 표출한 것들이며 또한 동시에 인간의 꿈과 이상을 표상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그게 이뤄질 현실적 조건은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에 의한 가상현실virtual realty은 이미 가현可現현실로 바뀌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기술적 진보를 활용해서 기존의 꿈과 이상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년기에 다양한 독서를 통해 그러한 변화를 포착하고 연계할 수 있는 조건을 배양해야 한다. 유년기의 독서가 특정한 분야에 치우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상상력의 토대와 재료는 지식과 경험이다. 상상력은 공상이 아니다. 상상력은 지식과 경험을 여러 가지로 묶고 얽고 짜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함께 새로운 이미, 드러나지 않았던 가치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상상력은 지식과 경험의 합을 몇 배로 키워주는 놀라운 촉매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것은 생각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한 갈망이 자신 안에서 샘솟게 해야 한다. 독서는 바로 그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셈이다. 다양한 독서는 난삽한 독서가 아니다. 다양한 간접 경험들과 지식들이 쌓이고 그것들이 내 안에서, 내 삶을 통해서, 내 지식의 진보를 통해서 결합되고 화학적으로 반응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인식의 지평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독서의 출발은 반드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국제화의 토대로서의 독서
독서는 좁은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두루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 성장시킨다. 우리의 경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서는 다른 이들의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아무리 제한적 상황에 처해도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과 적절한 탐구를 그치지 않는다. 미래의 삶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보다 넓게 보는 사람에게 성공을 제공한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문제를 독서를 통해 찾음으로써 새로운 가치와 넓은 지평을 얻는다. 또한 그만큼 삶도 가치와 의미를 크게 얻을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쉽게, 그리고 단편적으로 습득하는 지식과 정보와 독서를 통해서 얻는 그것은 다르다. 인터넷을 통한 검색은 주제어 또는 검색어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하나의 총체적 사고를 형성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독서는 한 권의 책을 통독함으로써 저절로 전체에 대한 조망과 통찰력을 형성시켜준다. 인터넷의 시대에 오히려 독서가 요구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주체적 자아를 발전시키는 중심으로서의 독서
우리네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는‘자유로운 개인’의 발아와 실현이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의 가치’를 학습하고 고민한 적이 없다는 근본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의 극복이 바로 독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독서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사회적 문화적 관계성을 정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는 매우 매력적인 동시에 필수적이다. 자유로우면서도 넓게 보는 태도가 독서를 통해 형성되면 균형 있는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구체적 삶으로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독서는 능동적 행위이고 주체적 실현이다. 그것만큼 자아의 성찰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것을 찾기란 어렵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조건은 절대적 자유다. 그리고 자유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 더 많이 보장된다. 상상력은 개인과 사회의 무한한 자유를 제공하고, 자유는 새로운 창조를 이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독서의 가치는 바로 그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며 필수적인 덕목이다. 주체적 자아를 발견하고 완성시키도록 하는 내재적 동인을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지향하는 근본으로서의 독서라는 인식의 정립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독서의 즐거움
아무리 즐겁고 신나는 일이라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하면 금세 싫증난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경우는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독서는 즐거움을 체험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단순한 선행학습을 위해서 또는 지식의 탐색을 위해서 독서를 하면 범위도 좁을 뿐 아니라 즐거움은 급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한 상상력은 재미와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상상력의 영역은 무한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넘고, 제도와 관습도 뛰어넘는다. 상상력은 신나는 놀이와 같다. 재미없던 공부도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재미있고 훨씬 이해도 빠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현대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영상세대이기 때문에 영상적 이해가 빠지면 그 수용이 어렵다. 실제로 독서를 기피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비영상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독서가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글자를 통해 수용된 내용을 스스로 비주얼화할 수 있음으로 해서 자신만의 틀을 짤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TV의 드라마는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면 연출자나 배우가 해석한 것을 그대로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능동성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독서는 스스로 그것을 영상으로 전환시킬 수박에 없고, 그것을 통해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체득하게 된다는 점에서 독서의 현대적 의미와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구성하는 상상력이 주는 무한한 재미는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따라서 부모나 교사는 독서를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상을 구성하는 재미있는 도구이며 수단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자녀들이나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역사 수업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역사책에 나오는 사건에 관해 진술하는 하나의 문장은 때로는 수십 년의 걸친 다양한 사건들의 압축판일 수 있다.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해 암기해야 할 하나의 문장과 거기에 담긴 수많은 스펙트럼을 그려낼 수 있도록 하는 문장은 근본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그걸 읽어내는 독자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상상력은 이와 같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상상력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과 그저 단순한 문장의 나열로 읽는 것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상상력은 또한 재미와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상상력의 영역은 무한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고 제도와 관습도 뛰어넘는다. 상상력은 신나는 놀이와 같다. 재미없던 공부나 독서도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재미있고 훨씬 이해도 쉽고 빠르다.
책 읽는 부모의 삶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때론 책을 읽어봐야 삶도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 않는 핑계로 책을 멀리한다. 그러나 과연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가를 짚어보면 그런 핑계의 원인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읽는 삶은 자신을 바꾼다
책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정보, 그리고 감성과 상상력을 유입시킴으로써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하는 힘을 제공한다. 책은 특정한 지식이건 보편적 정서건 간에 그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확실한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생각을 키우고 바꾸며 발전하게 만든다.
책 읽어주는 부모가 아이를 바꾼다
괴테를 대문호로 만든 것은 어린 괴테에게 끊임없이 책을 읽어줬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읽어준 이야기들이 어린 괴테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얽히고 짜여지면서 사상과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성장기의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모,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의 모습보다 나은 것은 찾기 어렵다.
책 읽는 부모가 가정을 바꾼다
현대인의 삶은 바쁘고 고되다. 가장은 가장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쁘고 힘들다. 그런데 대부분 주부의 대외적 존재감은 남편의 지위와 소득, 그리고 아이들의 진학에 의존되어 있는 듯 보이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남편과 아이들에게 보이게 보이지 않게 압력을 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주부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진정한 삶과 행복의 가치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그런 압력을 벗고 격려와 응원을 보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가정의 평화와 화목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책 읽는 부모는 교육을 혁명시킬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큰 부담이 되고, 심지어 사회적 양극화의 구조적 바탕을 구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교육과 사교육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핵심은 책 읽는 부모가 자녀와 함께 책을 읽음으로써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다. 지금은 현실 교육의 문제가 임계점에 도달한 때이다. 임계점에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붕괴한다. 임계점을 인식한 것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책 읽는 부모는 민주주의의 가장 든든한 밑돌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구성원 모두는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 정치는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게 결코 아니다. 정치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전부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주부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책에 대한 지식을 쌓는 일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 책을 읽는 주부는 밝은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더 나은 미래 사회를 위한 정치적 선택에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유권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건강한 토대다 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현재와 미래 사회에 대해 갖춰야 할 의무이자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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