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자기선택권
한국의 어린이·청소년은 OECD 가입국가 중에서 행복지수가 제일 낮다고 합니다. 또한 2014년 한국방정환재단이 연세대학교 연구팀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고, ‘성적 압박이 심할 때’와 ‘학습 부담이 클 때’ 가장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의 행복감이란 게 전적으로 어른의 태도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는 실정인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어른의 마음은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녀를 둔 어른들은 아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아이들이 나처럼 무시당하면서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살지 않게 하려면, 지금 힘들더라도 죽자사자 공부만 하도록 시키는 수밖에 없어.’ 혹은 ‘적어도 나만큼 누리고 살 수 있게 하려면, 딴생각할 것 없이 자나깨나 공부만 하도록 시키는 수밖에 없어.’ 자살률 최상위, 출산율 최하위 등 삶의 질과 관련된 부정적 지표가 하나둘이 아닌 것을 알기에, 이런 생각을 덮어놓고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린, 난, 뭐 하고 있었나? 뭐하고 있는가?’ 하는 자책감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해야 마땅하지만, 어린이의 삶을 식민지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방안에만 가두어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손오공에게 머리띠를 두르듯, 손 안의 통제에 두고 낱낱이 감시하려 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는 일은 어른의 몫이요, 어린이의 몫은 마음껏 뛰어노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오직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신나고 알차게 보낼 수 있게끔 그들의 선택권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아동기는 곧 성장기입니다. 어른과 구별되는 아이들만의 특성은 몸도 마음도 아주 빠르게 자란다는 데 있지요. 아이들은 누구나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어린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어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점은 생장하는 세포의 명령입니다. 자연의 이치고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 자립심의 배양, 바로 이것이 성장인데, 요즘 부모들은 기를 쓰고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변태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을 품 안에 두고 보호해야 안심이 된다는 태도겠지만,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어른일수록 자기가 어렸을 때 품었던 생각과 감정을 새까맣게 잊고 사는 ‘배신자’이기 일쑤입니다.
어린이가 고독할 자유
예전에 대학원 강의요청으로 보름가량을 춘천교대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 엄청 많은 눈이 내려서 거기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내심 바라던 바였지요. 하얀 무위無爲의 시간이 제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루 한 번 강의실을 찾아 눈길을 걸을 때면 깊은 산중에 들어선 양 사위가 적막했습니다. 폭설로 인해 도시는 교통대란에 빠져들었겠지만, 저는 숨 막힐 것 같은 고적감에 수시로 심호흡을 하곤 했습니다. 깊은 고요와 긴 침묵을 배경으로 해서였을까요? 세 시간짜리 강의임에도 힘든 줄 모르고 열중했던 기억이 납니다. 똑같은 강의를 인하대에서 늘 하고 지내지만 그때 그 기분을 도무지 느끼지 못합니다. 고요와 침묵의 배경이 없어지고 나니, 준비한 말들 사이로 솟구치는 창조적 에너지가 그때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춘천교대 일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폭설로 인한 뜻밖의 경험이었을 뿐이고, 저는 좀체 무위를 허용치 않는 현실의 톱니바퀴에 끼여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휴식시간을 갖지 못해서 문제는 아닙니다. 영화관에도 자주 가고, 혼자 연구실에서 하릴없이 지내는 날도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절대적 의미에서 무위나 고독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삶의 방식이 그런 것이겠지요. 춘천교대에 머물 때, 저와 연배가 비슷한 그림책 작가 이억배 씨의 공개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었습니다. 『솔이의 추석이야기』의 준비과정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집 안팎에 이런저런 ‘구석’들이 참 많았어요. 아이들이 놀기 위해 찾는 장소가 대개 그런 구석이지요. 야단맞고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드는 곳도 구석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렇구나, 지금 우리 아이들한테는 도무지 구석이란 게 없구나!
때마침 일리즈 보울딩Elise Boulding이라는 미국의 사회학자가 쓴 「어린이와 고독」(『창비어린이』, 2010년 여름호)이라는 번역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구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린이와 고독이라면 뜬금없다고 여기기 쉽지만, 어린이가 인간의 기본감정을 공유하는 데 어른과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독은 사회적 소외와는 구별되는 개념이겠지요. 함께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집단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누구에게나 고독할 수 있는 자유도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이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약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의미 있는 내성內省을 행할 기회로서나, 자연에 내맡긴 무위의 감각을 익히는 기회로서나, 어린이의 고독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른들은 불손하다고 여기는 ‘어린이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린이의 시간을 빈틈없이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 어른은 포크레인으로 중무장한 개발주의 국가정부와도 닮은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빈 구석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국토개발이 끔찍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도서관은 일상의 구석
가끔 어린이도서관에 강연을 다니면서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건물 안보다는 바깥에 더 관심이 많기에 밖에서 혼자 어슬렁거리는 편입니다만, 어린이들이 눕든 기대든 제멋대로 뒹굴며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일부러 굴처럼 어둡고 작은 방을 만들어놓은 데도 더러 있더군요. 하여간 어린이에게 도서관은 통째로 일상의 구석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서관이란 어떤 곳인가요? 비치된 책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세계와 통하는 순간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만나면서 마음껏 여행을 즐기는 마법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곧 도서관은 어린이가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어도 좋다고 허여된 귀중한 공간인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것인데, 일본 가마쿠라鎌倉 시 중앙도서관 이야기는 모두 관심 깊게 읽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서가 도서관 공식 트윗에 올려서 학교에 가는 게 죽을 만큼 괴로운 아이는 도서관으로 오라고 호소했다는 기사 말입니다. “곧 있으면 2학기. 학교가 시작되는 것이 죽을 만큼 괴로운 아이는 학교를 쉬고 도서관에 오세요. 만화도 라이트노벨도 있어요. 하루쯤은 아무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요. 9월부터 학교에 갈 정도라면 죽어버리자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도망갈 장소로 도서관도 생각해 봐요.” 이렇게 멋진 멘트를 날린 사서는 2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에 어린이의 자살이 많을 것을 알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시 교육위원회에서는 학교에 대한 부적절한 표현 때문에 논란이 있었으나, 어린이를 위하는 기본적인 의도를 존중하고 글을 삭제하지 않았다는군요.
이와 같은 일도 왕따, 학교폭력, 자살 등 과거에 보기 어려웠던 신종 현상이 극에 달하면서 나타난 어떤 징후 같아서 입맛이 개운치 않은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죽음의 절벽을 향해 달리는 기차는 우선 멈춰 세우고 봐야 한다는 생명의 대원칙입니다. 근본적인 처방은 아닐지라도 아픔에 공감하는 각계의 노력들이 모여서 고통을 완화하는 동시에 더 나은 해결책으로 나아가게 되겠지요. 도서관의 위상이란 것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 옳습니다. 현실의 도피처는 긴급 피난처이기도 할 것이며, 구원의 장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어린이전용 ‘기적의 도서관’을 출범시킨 순천시가 이번에는 놀이기구 없는 ‘기적의 놀이터’를 조성한다는 소식도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도서관’과 짝을 이루는 제이, 제삼의 ‘기적의 놀이터’가 계속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어린이문학은 생명의 숨구멍
끝으로 저의 주된 관심 영역인 어린이문학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들어 좋은 어린이책을 만들어도 충분한 독자를 만나지 못해 힘겨워하는 출판사와 작가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진 지식정보책 분야도 그럴 테지만, 특히 어린이문학 부문은 아주 혹독한 추위를 느끼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21세기는 어린이문학의 르네상스와 함께 개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린이문학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10년 넘게 호황국면을 누렸습니다. 전국 곳곳에 ‘기적의 도서관’이 세워지던 때도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일일까요?
경제사정이 어려워진 탓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사뭇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IMF사태로 고통받고 있을 때도 어린이문학 분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신진작가들이 속속 배출되었고, 단행본 출간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평론을 싣는 어린이문학 전문지, 논문을 싣는 어린이·청소년문학 학회지도 여럿 생겨나면서 어린이문학은 ‘비평의 무풍지대’, ‘연구의 사각지대’라는 말도 사라졌습니다. 어린이문학의 르네상스는 우리 사회가 1990년대 이후 실질적인 시민사회로 도약하는 시기와 맞물린 현상이었습니다. 그건 20세기 내내 결여되었던 부분이 채워지는 과정이었지 결코 넘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유아그림책부터 청소년문학에 이르기까지 균형발전에 도달한 지금이야말로 본격적인 전개가 기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하여 날개를 잃고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곤욕스러운 사태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유는 한둘이 아니겠습니다만, 이전의 르네상스기와 비교했을 때,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이에게 허여된 시간이 거의 전무하다는 게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정말 너무나 바쁩니다. 대관절 누가 오늘날의 한국 어린이보다 더 바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어린이들은 학습에 너무나 짓눌려 있습니다. 어른이 요구하는 유용성의 포로가 되어 있어요. 매력적인 들쥐 시인의 탄생을 보여준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그림책 『프레드릭』에서 보는 것처럼, 문학은 먹이를 구하는 ‘쓸모’와는 다소 거리가 멀지라도,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는 고유의 몫으로 생명력의 고양에 기여합니다. 상상의 세계인 문학은 분명 다른 세계로 열린 창입니다. 저는 ‘불온한 산소’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만, 한마디로 숨구멍이지요. 요즘 어린이처럼 짓눌릴 대로 짓눌린 생명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숨구멍인데, 거꾸로 어린이를 위한다는 어른의 요구가 그 숨구멍을 틀어쥐고 있으니, 이런 기막힌 일도 따로 없을 듯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린이가 어린이일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아주는 일은 어른의 책무입니다. ‘한눈팔기’의 중요성을 인식한 어른부터가 자녀와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고, 나아가서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사회를 향해 ‘이제 그만!’하고 더 크게 목소리를 내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일을 벌이는 중심에 ‘기적의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다행이라 여기면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